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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길을 잃은 참전용사에 빛이 되어준 어느 작가의 기도 [Guideposts]

'나니아 연대기' 쓴 C S 루이스에 치유받다, 제레미야 브로드릭
절망적인 군복무와 위태로운 결혼생활
"내가 지은 죄에 대해 느끼는 수치심은
이성이 말하는 중대함과 일치하지 않는다"
영국 작가의 이 글귀가 시작이었다
3년에 걸쳐 작가의 모든 글을 읽었다
전쟁을 겪으며 신앙심을 잃어갔던 그
그리고 그 글속에서 답을 찾았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셨다면
우리도 스스로를 용서해야 한다"

신앙의 길을 잃은 참전용사에 빛이 되어준 어느 작가의 기도 [Guideposts]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셨다면 우리도 스스로를 용서해야 한다." 군인 출신 목사인 제레미야 브로드릭(오른쪽)은 '나니아 연대기'의 저자이자 기독교 작가인 C S 루이스의 책을 통해 무너진 신앙심을 회복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신앙의 길을 잃은 참전용사에 빛이 되어준 어느 작가의 기도 [Guideposts]

'가이드포스트(Guideposts)'는 1945년 노먼 빈센트 필 박사에 의해 미국에서 창간된 교양잡지로, 한국판은 1965년 국내 최초 영한대역 잡지로 발간되어 현재까지 오랜 시간 독자들의 꾸준한 사랑을 받아오고 있습니다. 가이드포스트는 실패와 좌절을 딛고 다시 일어선 사람들, 어려움 속에서 꿈을 키워가며 끊임없이 도전하는 사람들의 감동과 희망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이런 감동의 이야기를 많은 분들의 후원을 통해 군부대, 경찰, 교정시설, 복지시설, 대안학교 등 각계의 소외된 계층에 전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후원을 통해 더 많은 이웃에게 희망과 감동의 메시지가 전달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후원문의 (02)362-4000
나는 아주 오랜 시간 스스로를 영적인 실패자라고 여기며 살아왔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나는 목사다. 한 아이의 아버지이며 해병대 참전 용사이기도 하다. 지금은 오클라호마의 교도소를 순회하며 재소자와 함께 예배를 드리는 목회 활동을 하고 있다. 나는 믿음의 대상을 갈구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실재하신다는 사실을 일깨워주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어떻게 영적으로 실패한 사람이 이 모든 일을 할 수가 있지?

시계를 12년 전으로 돌려보자. 당시 나는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전투 임무를 포함해 총 8년간의 군복무를 마치고 민간인의 삶에 적응하는 중이었다. 결혼생활은 위태로웠다. 군에 있는 동안 신앙도 거의 버리다시피 했다. 하나님께서 나를 가치 없는 패배자로 생각하실 거라 확신했고, 나 자신도 그 사실에 동의했다.

어떻게 그 모든 것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을까? 바로 페이스북에서 본 한 글귀 덕분이었다. 사람들이 마구잡이로 게시하는 영감을 주는 인용문 중 하나였다. 그 구절은 이런 것이다.

"내가 지은 죄에 대해 내가 실제로 느끼는 수치와 혐오의 정도는 내 이성이 말하는 그 죄의 상대적인 중대함과는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옥스퍼드대학의 교수가 쓸 법한 복잡하고 격식을 차린 언어였다. 그 속에서 나는 이런 단순한 메시지를 들었다. '영적으로 무가치하다는 감정이 나에 대한 최종 판결이 아닐 수도 있다. 내가 하나님의 태도를 잘못 판단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결론적으로 나에게도 기회가 있을지도 모른다.

글을 쓴 사람의 이름은 C S 루이스였다. 어렸을 때 읽었던 '나니아 연대기'를 쓴 그 C S 루이스인가? 그분이 기독교인이었나? 그는 마치 내가 느끼는 감정, 내가 듣고 싶은 말을 정확히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이 사람 누구지? 이 물음에 답을 찾는 과정에서 내 삶도 변화했다. 그 과정에서 알게 된 C S 루이스에 대한 한 가지 사실 덕분에 내 신앙심은 되살아났고 더욱 굳건해졌다. 그것은 바로 그도 나처럼 참전 용사였다는 사실이다.

C S 루이스는 기독교 분야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대학에서 중세 영문학을 가르친 교수다. 그렇다, 그는 '사자, 마녀, 그리고 옷장'의 작가이기도 하다.

그가 태어난 1898년 이후 100년도 더 지났지만 그는 여전히 수백만의 독자들에게 사랑받는 작가다. 루이스는 아일랜드 출신의 기독교 가정에서 성장했지만 10대 시절 신앙에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19살 때 영국 육군에 의해 제1차 세계대전의 최전선으로 보내졌고, 보병으로 끔찍한 참호 속에서 싸웠다. 포격으로 부상을 입고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는 철저한 무신론자가 되어 있었다. 루이스는 군인이 가지고 있는 정신적 부상을 이해했다. 또한 하나님께서 그 모든 것을 어떻게 치유하시는지도 알고 있었다.

루이스 덕분에 이제는 나도 그 사실을 알고 있다. 어렸을 때의 신앙을 언제 잃었는지 정확히 말하기는 어렵다. 나는 교회와 함께 성장했다. 하지만 부모님이 이혼하시고 어머니가 빠진 종교가 기독교 이단이라는 사실이 드러났을 때 상황이 복잡해졌다.

두 형과 나는 아버지와 함께 살았다. 아버지는 훌륭한 분이었지만 교회에 다니지는 않았다. 아버지와 상관없이 우리 형제들은 교회에 나갔다. 우리 교회는 성서를 엄격하게 해석해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지당하신 분노에 초점을 맞췄고, 우리는 그 지식을 그대로 흡수했다.

나는 그 분노가 무서웠다. 하나님이 10대 시절 신앙에 등을 돌리고 나쁜 행동을 일삼은 나를 싫어하실 거라 확신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해병대에 입대한 뒤 내가 자란 오클라호마와는 완전히 다른 세계를 발견했다. 기독교에 대해 한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온갖 종류의 사람들을 만났다. 하나님은 저들을 비난하실까? 하나님이 많은 의심을 품은 나 또한 비난하셨는지도 모른다. 나는 의심 그 자체를 사실상 죄악으로 생각했다.

박격포 분대에서 복무할 때 한 줄기 희망도 보이지 않는 절망을 목격했다. 신은 어디 있는 거지? 그런 감정들을 다스리기 위해 술을 마셨고, 하나님이 그것도 싫어하실 거라 생각했다. 결혼을 하고 아들을 낳았다. 자대 재배치를 받게 되자 결혼생활은 우리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려워졌고, 결국 우리는 이혼했다. 그걸로 끝이었다. 나는 군복무를 그만두기로 했다.

혼자 아들을 맡아 기르게 되었다. 나와 아들, 단 둘뿐이었다. 퇴역 전 캘리포니아의 해병대 기지에서 남은 몇 달을 복무하고 있을 때 군 동료들과 나는 내 어린 아들을 먹이고, 기저귀를 갈아주고, 문신을 한 우람한 팔로 안아주는 일을 교대로 했다. 돌이켜 생각하면 참 아름다운 그림이다. 하지만 당시에는 나 자신이 최악의 아빠로 느껴졌다.

아들을 데리고 오클라호마로 돌아왔다. 이해가 안가겠지만 나는 교회에서 할 수 있는 일자리를 알아봤다. 하나님의 존재는 거의 믿지 않았지만 교회는 안전하게 느껴졌다. 기독교인처럼 행동하면 하나님의 인정을 다시 받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페이스북에서 C S 루이스의 글귀를 우연히 발견한 것이 바로 이때, 인생의 나락에 빠져 있을 때였다. 글의 출처를 찾아보았다. 그것은 '개인 기도'라는 책에서 발췌한 것이었다. 도서관에서 그 책을 빌려 탐독했다. 루이스는 내 삶을 대신 살기라도 한 것처럼 나와 똑같은 감정을 느끼고, 내가 한 질문을 똑같이 하고 있었다.

더 알고 싶은 마음에 그의 명작 '순전한 기독교'를 찾아 읽었다. 책에서는 기독교인이 '되고 싶은' 생각이 들도록 내 어린 시절을 함께한 신앙인 기독교를 설명하고 있었다. 그전까지는 기독교인이 '되어야 한다'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루이스의 영적 여정을 다룬 자서전 '기쁨에 놀라다'도 손에 넣었다. 그의 군복무 시절을 다룬 '총과 좋은 벗'이라는 제목의 챕터에 이르렀다. 그는 "섬뜩함, 추위, 고성능 폭약 냄새, 몸통의 반이 으스러진 딱정벌레처럼 여전히 꿈틀대는 끔찍한 모습으로 박살난 사람들, 앉아 있거나 서 있는 시체들,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땅의 풍경"을 묘사했다.

영국으로 돌아오자마자 그는 머릿속에서 신에 대한 모든 생각을 지워 버리기로 결심했다. 루이스는 그를 다시 신앙으로 이끌고 하나님을 새로운 시각으로 이해한 감정적 여정을 되짚는다. 그는 "굴복하고, 하나님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인" 밤을 이야기하면서 자신을 "영국에서 가장 비참하고 주저하는 개종자"라고 부른다.

'가장 비참하고 주저하는 개종자.' 그 사람은 바로 나였다. 어째서 하나님은 그토록 여러 가지 방식으로 당신에게 등 돌린 사람을 두 팔 벌려 받아주시는가?

내가 백기를 들고 하나님을 처음으로 경험한 순간은 루이스가 그랬던 것처럼 극적이지는 않았다. 대신 루이스가 쓴 거의 모든 글을 읽는 데 3년이라는 시간을 보냈다. 사우스웨스턴신학교에 정규 학생으로 등록을 하고 석사학위를 받았다.

지도교수님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나는 결국 자애롭고 자비로우신 하나님을 숭배하는 한 교회에서 일자리를 얻었다. 범죄를 저지른 적은 없지만 교도소 사역에 마음이 갔다. 재소자가 느끼는 감정을 정확히 이해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스스로 하나님께 결코 사랑받을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수치심과 의심이라는 감옥에 갇혀 있었다. 군 복무와 관련해 간과하는 사실은 감정적, 영적인 상처가 단지 전쟁으로 인한 부상에서만 비롯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입대할 때 나와 비슷한 상황에 처한 군인들이 많다. 젊고, 방향을 찾고 있으며, 인생의 중요한 선택을 해본 경험이 없다. 전 세계로 보내지고 막중한 책무가 주어진다. 그 과정에서 끈끈한 전우애가 생기지만, 그것은 민간인의 삶으로 돌아오는 즉시 사라지고 만다.

인생을 망치는 방법은 너무나 많다. 누군가를 실망시킬 기회도 넘치게 많다. 건강한 가정생활을 하며 탄탄한 미래의 계획을 가진, 성숙하고 영적으로 자신감 있는 사람이 되는 길은 힘들다.

C S 루이스의 글을 읽으며 하나님이 그 모든 것을 포용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나님은 내 허물을 알고 계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사랑하신다. 나는 미완성의 작품이다. '하나님께서' 만들고 계시는 작품이다.

대학에 다닐 때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 대학이 주최한 C S 루이스에 관한 해외 연수 과정에 등록할 기회가 있었다. 루이스가 30년 넘게 학생들을 가르쳤던 곳이다. 루이스의 학문적 고향이라고 할 수 있는 막달레나 대학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다. 도착 후 얼마 되지 않아 루이스가 예배당에서 고해성사를 하기 위해 종종 세인트 스티븐 하우스로 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예배당을 직접 봐야 했다. 휴식시간에 나는 재빨리 강의실을 빠져나와 예배당으로 가는 길을 찾았다. 하지만 곧바로 길을 잃고 중세시대부터 거기 있었을 건물들 사이를 헤맸다. 학생 한 명이 방향을 알려주었다. 나무로 된 육중한 문을 열고 예배당 안으로 들어갔다. 양옆으로 나무의자들이 놓여 있었다. 흰색으로 칠을 한 아담한 공간이었다.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 몇 줄기에 먼지가 떠다녔다. 고요했다.

벽을 따라 놓인 등받이가 수직으로 꼿꼿이 선 의자에 앉았다. 루이스가 거기 무릎을 꿇고 앉아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는 모습을 상상했다.

루이스가 쓴 편지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셨다면 우리도 스스로를 용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보다 우리 자신을 더 높은 심판의 자리에 놓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 말을 간절히 믿고 싶었기 때문에 그 구절을 외우고 있었다. 눈을 감았다. 나무의자에서 내려와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두 손을 포갰다. 그리고 하나님께 용서를 비는 기도를 드렸다. 마음속으로는 이미 그렇게 하셨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가이드포스트(Guideposts)'는 1945년 노먼 빈센트 필 박사에 의해 미국에서 창간된 교양잡지로, 한국판은 1965년 국내 최초 영한대역 잡지로 발간되어 현재까지 오랜 시간 독자들의 꾸준한 사랑을 받아오고 있습니다.
가이드포스트는 실패와 좌절을 딛고 다시 일어선 사람들, 어려움 속에서 꿈을 키워가며 끊임없이 도전하는 사람들의 감동과 희망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이런 감동의 이야기를 많은 분들의 후원을 통해 군부대, 경찰, 교정시설, 복지시설, 대안학교 등 각계의 소외된 계층에 전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후원을 통해 더 많은 이웃에게 희망과 감동의 메시지가 전달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글·사진=가이드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