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변의 역사 ⑤>
유교 국가 조선에서 금기시됐던 정변
이성계 vs. 이방원...부자 간 참극 전말
함흥본궁. 조선이 개국 되자 태조 이성계가 즉위 이전에 살았던 함흥 귀주동(현재 함경북도 함흥시 사포구역 소나무동) 집터를 고쳐 지은 궁전 즉 잠저이다. 태조가 왕위를 양위한 뒤인 태상왕 때 머물렀으며 유명한 함흥차사의 전설이 깃든 곳이다.
[파이낸셜뉴스] '역성혁명(易姓革命)'을 표방하며 야심 차게 출범한 신생 국가 조선은 좀처럼 안정을 찾지 못하고 연이은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왕권주의(王權主義)와 신권주의(臣權主義)가 극심하게 대립했고, 이는 왕자의 난으로 이어져 골육상쟁(骨肉相爭)의 비극이 초래됐다.
더 나아가 아버지 이성계와 그의 아들 이방원 사이에 역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부자 간 참극마저 발생하게 된다. 군신유의(君臣有義)와 부자유친(父子有親) 등으로 대변되는 유교(儒敎) 국가 조선에서, 그 언급조차 금기시됐던 이 정변을 역사는 '조사의의 난'이라고 부른다.
■태종 즉위, 이성계의 함흥행
제 1,2차 왕자의 난을 통해 조정의 실권을 장악한 이방원은 곧 세자(世子) 자리에 오른 데 이어 1400년 자신의 형인 2대 왕 정종에게서 왕위를 물려받아 '태종'으로 즉위(卽位)했다. 태종이 즉위하자 태조 이성계(당시 태상왕(太上王))의 분노와 상심은 더욱 커져만 갔다. 이방원이 자신이 그 누구보다 아꼈던 세자 이방석과 삼봉 정도전 등을 척살한 것도 모자라 스스로 왕위까지 꿰찼기 때문이다. 그 이전에는 총애하던 신덕왕후 강씨도 잃었다.
이성계는 더 이상 이방원이 지배하는 궁궐에 있을 수 없었다. 겉으로 보기에 두 사람은 부자지간(父子之間)이었지만, 사실상 원수지간(怨讎之間)이 된 것이나 다름 없었다. 결국 이성계는 궁궐을 떠나 자신의 고향인 함경도(동북면)의 함흥 별궁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남은 여생을 조용히 보낼 계획이었다. 이성계는 추후에 전갈(傳喝)을 통해 이방원에게 "내가 즉위한 이래로 조종(祖宗)의 능에 한번도 참배하지 못한다고 일찍이 생각하고 있었는데, 지금 다행히 한가한 몸이 되었으니 동북면에 가서 선조의 능에 참배한 뒤에 금강산을 유랑코자 한다"고 전하기도 했다. 이런 가운데 이방원은 당초 이성계의 함흥행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이성계가 그곳에서 잠시 머물다 다시 궁궐로 환궁(還宮)할 것이라고 봤다. 그러나 머지않아 상황은 심각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조사의의 접근
함흥에 안착한 이성계에게 조사의라는 사람이 접근했다. 조사의는 신덕왕후 강씨의 친척으로 1393년(태조 2년)에 형조의랑이 됐고, 그 뒤 순군(巡軍)과 첨절제사를 거쳐 안변부사로 재직하고 있었다. 조사의와 더불어 신덕왕후 강씨의 조카인 강현도 있었다. 이들은 이방원의 정적(政敵)이었던 신덕왕후 측의 사람들이었던 만큼 자연스레 이방원에 대한 적개심이 상당했다. 그런데 자신들의 힘으로는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는데 때마침 이성계라는 거대한 우군(友軍)이 알아서 자신들의 구역으로 왔던 것이다.
조사의 등은 이방원에 대한 분노와 상심으로 가득 차 있는 이성계를 찾아가 그의 마음을 적극적으로 자극시켰다. 바로 1차 왕자의 난 때 무참히 살해된 이방석과 이방번 등의 원수를 갚고, 역적(逆賊) 이방원과 그를 따르는 무리들을 척살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조사의는 정변에 동원할 수 있는 군사력도 충분하다고 봤다. 이성계의 고향인 함경도 지역에는 대대로 이성계를 따르는 무리들이 많았고, 지역민들도 이성계를 절대적으로 지지하고 있었다. 나아가 우호 세력인 여진족이 참전할 가능성도 있다고 전망했다. 결국 1402년(태종 2년), 이성계는 조사의의 의도대로 군사를 일으키는 것에 동의했다. 역사는 이를 '조사의의 난'이라고 기록하고 있지만, 사실상 조사의의 배후에 있었던 이성계와 그의 아들 이방원의 부자 간 전쟁이었다.
■함흥차사의 전설
한편, 이방원은 적지 않은 시간이 지나도 이성계가 돌아올 기미를 보이지 않자 점차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이에 이방원은 이성계를 회유하기 위해 함흥으로 사람을 보냈다. 대표적인 사람이 박석명, 성석린, 박순이었다. 박석명은 지금의 비서실장인 도승지였고, 성석린은 지금의 서울시장인 한성부판윤과 재상인 영의정부사를, 박순은 중추부의 종1품 관직인 판중추부사를 역임했다. 특히 성석린은 이성계의 오랜 친구이기도 했는데, 성석린이 회유했을 때 이성계는 이를 수락하며 잠시 개경으로 환궁하기도 했다. 그러나 얼마 안 가 이성계는 다시 함흥으로 돌아갔다. 이 때 이성계가 잠시 환궁한 것은 기실 조사의가 거병을 준비할 시간을 벌어주고 개경의 동태를 살펴 조사의에게 알려주기 위함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성석린의 회유도 결국 실패로 끝나자 이방원은 성석린만큼 이성계와 친분이 두터운 박순을 함흥으로 보냈다. 그런데 박순은 실제로 이성계를 만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고, 대신 함경도 일대의 동태가 심상치 않게 돌아감을 직감해 도순문사 박만과 함께 이 지역 수령들에게 "조사의를 따르지 말라"고 설득하고 다녔다. 조사의 등은 박순이 자신들의 거병 준비를 어느 정도 파악했다고 생각했다. 이에 조사의 등은 이성계에게 박순을 반드시 제거해야 한다고 주청했다. 이성계는 고민에 빠졌다. 옛 정을 생각해 박순을 살리고 싶었지만, 그렇게 되면 거병이 탄로 날 가능성이 높았다. 이에 이성계는 조사의 등에게 박순이 안변 아래쪽에 흐르는 용흥강을 건너갔으면 죽이지 말고, 건너지 못했으면 죽이라고 명했다. 박순은 불운하게도 용흥강을 건너지 못한 상태였고, 결국 조사의가 급파한 군사들에게 죽임을 당했다.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은 이방원이 함흥에 차사(差使)로 보냈던 사람들이 모두 이성계에게 죽임을 당해 돌아오지 못한 것으로 알고 있다. 이것이 바로 '함흥차사의 전설'이다. 그러나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이는 역사적 사실과는 거리가 있으며, 실제로 죽임을 당한 사람은 박순 한 명 뿐이었다. 함흥차사의 전설은 후대의 일부 역사가들이 조사의의 난을 보다 드라마틱하게 포장하는 과정에서 나온 야사(野史)로 보인다.
■조사의의 난
이성계와 조사의가 거병했을 때, 예상대로 함경도의 수많은 사람들이 이성계 측에 가담했다. 거병 소식을 전해 들은 이방원과 조정의 대신들은 큰 충격에 빠졌고, 대응에 골머리를 앓게 된다. 그도 그럴 것이 상대는 현 임금의 아버지이자 조선을 건국 한 태조 이성계였기 때문이다. 반란군이 평안도의 덕천·안주 방면을 거쳐 한양 쪽으로 밀고 내려오려 하자 이방원은 마지못해 이천우 등을 보내서 이를 방어하도록 했다.
하지만, 반란군의 위세는 생각보다 강력했다. 고맹주 지역에서 이천우의 군대가 격파 된 것이다. 반란군은 전장에서 '태상왕' 이성계의 권위를 앞세우는 전략을 구사했는데, 이성계를 나타내는 깃발 등을 흩날리며 앞으로 진격해 나갔다. 이런 상황에서 관군은 적지 않게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관군의 선발대가 패배하고 반란군의 남하(南下)가 이어지자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한 이방원은 친히 군사를 이끌고 전장으로 향하기로 했다. 이로써 우리나라 역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부자 간의 직접적인 무력 충돌이 현실화 됐다.
이방원이 관군을 진두지휘하면서 전황(戰況)에 차츰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관군의 사기가 드높아졌고, 이를 기반으로 관군은 압도적인 물량공세를 퍼부었다. 기본적인 양과 질에서 관군은 반란군보다 크게 앞섰다. 그리고 관군은 다양한 전략을 구사하며 반란군을 난관에 빠뜨렸다. 각 고을의 군사를 효율적으로 동원해 반란군의 진로를 저지하는 한편 회유책도 구사해 반란군을 분산시키기도 했다. 결정적으로 청천강 전투에서 이숙번이 이끄는 관군이 반란군을 대패시키면서 반란군의 전의(戰意)는 땅에 떨어졌고 탈영병이 속출하면서 안변 쪽으로 퇴각하게 된다. 관군은 조사의와 그의 아들 조홍 등을 신속하게 추격해 체포, 주살(誅殺)했다. 조사의와 반란을 함께 한 측근들은 죽거나 귀양을 갔고, 반란의 태동지였던 안변 대도호부는 감무 파견지역으로 강등(降等)됐다.
■이성계의 거취
조사의의 난이 완전히 진압된 후 이성계는 반란군의 주둔지였던 평양에서 아들 이방원의 처분을 기다리는 신세가 됐다. 조선을 건국 한 '태조'치고는 상당히 처량한 모습이었다. 이방원은 이전과 다를 바 없이 끊임없이 사람을 보내 이성계를 개경으로 모셔오고자 했다. 이성계는 한동안 거부하다 마지못해 개경 궁궐로 환궁했다. 야사에서는 이성계의 오랜 정신적 스승이었던 무학대사의 설득으로 이성계가 마침내 돌아왔다고 전하고 있다. 이방원은 직접 교외로 마중 나가 이성계를 맞이했다.
일각에서는 이성계가 환궁할 때 노여움을 버리지 못해 현재의 성동구 한양대학교 뒤쪽 중랑천을 가로지르는 돌다리 부근에서 이방원을 향해 화살을 쐈고, 그 화살이 급히 몸을 피한 이방원을 벗어나 정자의 나무기둥에 꽂혔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화살이 꽂힌' 장소라는 데에서 유래해 해당 돌다리는 '살곶이 다리'라고 불리기도 한다. 그러나 당시 궁궐이 한양이 아닌 개경에 있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이야기의 신빙성을 확신할 수 없다는 반론도 제기된다.
또한 환궁 잔치가 열린 자리에서 이성계가 소매 안에 철퇴를 감추고 이방원의 목숨을 노렸는데, 최측근이었던 하륜의 기지(機智)로 이것이 무위(無爲)에 그쳤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이성계는 이방원이 자신에게 직접 술을 따를 때 철퇴로 내리치려고 했지만, 하륜이 이성계의 의도를 미리 눈치채고 예법을 거론하며 환관으로 하여금 대신 술을 따르게 했던 것이다. 이후 이성계는 하늘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비로소 이방원에게 옥새를 넘기며 왕으로 인정했다고 한다.
환궁한 이성계는 여생을 조용히 궁궐에서 보내다 1408년 5월(태종 8년)에 승하(昇遐)했다.
일개 변방 장수에서 출발해 조선의 건국자로 올라섰던 풍운아 이성계는 결과적으로 말년(末年)이 좋지 못했다. 아버지를 향한 회한(悔恨) 때문이었을까. 이성계가 승하하자 아들 이방원은 "소자가 잘못했습니다"라며 '짐승처럼' 슬피 울었다고 전해진다. 이성계의 능호는 건원릉(健元陵)이며 단릉(單陵)이다.
kschoi@fnnews.com 최경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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