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일 서울 용산구 서빙고로 국립중앙박물관 상설전시관에서 열린 위대한 문화유산을 함께 누리다 '고 이건희 회장 기증 명품전' 언론공개회에 참석한 취재진이 국보 제216호인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 그림을 살펴보고 있다. 전시는 내일부터 9월 26일까지다. 사진=서동일 기자
[파이낸셜뉴스] "문화에 대한 이해가 일상화돼야 문화강국이 된다."
미술 작품을 통해 문화강국을 향한 고(故) 이건희 삼성회장의 깊은 철학을 마주할 수 있는 기회가 열린다. 오는 21일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각각 개최될 예정인 '위대한 문화유산을 함께 누리다-고 이건희 회장 기증 명품전'과 'MMCA 이건희컬렉션 특별전: 한국미술명작'전에 앞서 열린 간담회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이 두 전시 기관은 이건희 컬렉션의 대표작 100여점을 선공개했다. 이 두 전시에 소개된 작품들은 지난 4월 이건희 회장의 유족이 국가에 기증한 작품 2만3100여점의 일부로 역사적 가치와 미술사적 가치를 가진 핵심작들이다. 한반도의 선사시대 유물부터 고대와 중세의 유물과 미술 작품을 비롯해 근대와 현대 작가들의 주요 회화 작품에 이르기까지 다채롭고 방대한 컬렉션에 생전 이건희 회장의 넓고 깊은 안목을 살펴볼 수 있다.
■이건희 회장의 안목으로 선별한 시대 대표하는 위대한 유산
국립중앙박물관 '위대한 문화유산을 함께 누리다-고故 이건희 회장 기증 명품전' 전시 전경. 왼편에는 청동기 시대부터 삼국시대까지의 토기가 전시돼 있고 오른편에는 19세기 조선 시대에 그려진 십장생도 10폭 병풍이 전시돼 있다. /사진=국립중앙박물관
먼저 국립중앙박물관은 청동기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의 금속, 도토기, 전적, 서화, 목가구 등 이 회장 유족이 기증한 9797건, 2만1600여점 가운데 시대와 분야를 대표하는 명품 45건 77점을 추려 이번에 공개했다. 이번 전시를 기획한 이수경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은 "이번 전시에서 처음 공개되는 유물은 없다"며 "이번 전시는 잘 알려진 유물들의 진가를 보여주는 게 목적이며 이번 전시에서 처음 공개되는 유물은 없지만 기증자인 이건희 회장의 안목을 살펴볼 수 있도록 명품을 명품답게 자세하게 설명하고자 했다"고 밝혔다.
국립중앙박물관 '위대한 문화유산을 함께 누리다-고故 이건희 회장 기증 명품전' 전시 전경. 오른편에는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1751)'가 걸려있고 왼편에는 단원 김홍도의 '추성부도(1805)'가 걸려있다. /사진=국립중앙박물관
이번 전시에서 가장 눈에 띄는 작품은 겸재 정선의 최고 걸작으로 꼽히는 국보 제216호 '인왕제색도'로 전시장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왼쪽 벽 우측에 장대한 면모를 보였다. 긴 장맛비가 갠 후 물기를 머금어 묵직한 범바위와 코끼리 바위, 치마 바위 아래 폭포를 이룬 수성동 계곡과 산 등성 한양성곽의 모습이 세세하게 묘사돼 있다. 이수경 학예연구관은 "이 작품을 그릴 당시 인왕산은 명승지가 아니었고 정선에겐 그저 동네 뒷산일 뿐이었지만 그는 여느 명산보다 더 멋지게 그려냈다"며 "추사 김정희가 '아침엔 북악의 안개를 보고 저녁에는 인왕의 노을을 본다'고 말했던 것처럼 정선에게 인왕산은 동네 뒷산과 같았지만 그렇기에 더욱 애정을 담아 산의 구석구석 요소가 살아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이 연구관은 "무엇보다 이 작품은 누구를 위해 그렸는지에 대해 여러 가설들이 있는데 그 가운데 후원자였던 이춘재를 위해 그렸다는 추측도 있다"며 "이 부분에서 당시에도 예술에 후원을 아끼지 않는 이들의 중요성을 떠올리며 이건희 회장의 정신과도 맞닿아 있음을 생각해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인왕제색도'의 왼편에는 조선시대 최고의 화가라 불리는 단원 김홍도의 마지막 작품으로 알려진 '추성부도'가 나란히 걸렸다. 중국 '북송'의 문인 구양수가 쓴 '추성부'의 내용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이 작품은 가을 밤 흔들리는 나뭇가지 소리에 놀란 선비가 동자와 나눈 대화 내용을 그려냈다. 인생의 말년에서 죽음을 앞둔 김홍도가 선비에게 자신을 투사시켜 표현한 작품이다. 한편 이날 전시에는 현존하는 고려불화 중 유일한 '천수관음보살도(보물 제2015호)'와 삼국시대에 만들어진 국보 제134호 '일광삼존상' 등 국보와 보물 28건을 비롯해 청동기시대 '붉은 간토기'와 조선시대 백자까지 다양한 작품들이 전시됐다. 전시는 9월 26일까지.
■이건희 회장의 근현대 한국미술 셀렉션도 공개
20일 서울 종로구 삼청로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MMCA 이건희컬렉션 특별전: 한국미술명작' 언론 공개회가 열리고 있다. 사진=서동일 기자
용산에서 서울 삼청동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으로 발길을 옮기면 1층에 이건희 회장이 생전에 아꼈던 한국 근현대미술 작품 58점을 만날 수 있다. 이번 전시에는 한국인이 사랑하는 거장 34명의 주요 작품 58점이 전시됐다.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의 박미화 현대미술1과장은 "이번 전시는 이건희 회장이 기증한 1488점 중 한국 근대 회화에 집중해 기획했다"며 "지난 4월 수증 이후 연구 조사를 우선 마친 작품들을 중심으로 구성했다"고 말했다. 박 과장은 "근대의 기준은 작가의 생몰을 기준으로 1920~1930년대 출생한 작가들의 작품으로 선정했다"고 부연했다.
이번 전시는 '수용과 변화', '개성의 발현', '정착과 모색' 등 3부로 구성돼 있는데 일제 강점기 신문물의 유입으로 변화를 맞이한 조선의 전통 서화와 미술계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작품부터 1945년 광복을 맞이하고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던 격동기에 오히려 새로운 미술의 장을 열었던 작가들의 작품세계, 전후 복구 시기에 국내외에서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펼쳐나갔던 이들의 작품이 걸렸다.
20일 서울 종로구 삼청로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MMCA 이건희컬렉션 특별전: 한국미술명작' 언론 공개회가 열리고 있다. 사진=서동일 기자
이상범과 백남순, 박수근, 이중섭, 유영국, 이성자, 남관, 이응노, 권옥연, 김흥수, 박생광, 천경자 등 이름 하나 하나 가벼이 넘길 수 없는 거장들의 작품들로 가득한 데 이 가운데서도 핵심으로 꼽히는 작품은 전시장의 한 중간에 있는 김환기의 '여인들과 항아리'다. '파리 시대'로 명명되는 1950년대 후반에 제작됐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 작품은 전시장의 한 벽 전체를 가득 채울만큼 거대하다. 박미화 과장은 "김환기는 생전에 백자 달항아리를 끔찍히도 아꼈던 것으로 유명한데 이 작품에는 백자 항아리의 이미지와 더불어 그가 사랑하고 즐겨 사용했던 학, 사슴, 반라의 여인들, 꽃장수의 수레, 새장 등의 모티브들이 파스텔톤의 색면 배경 위에 양식화 돼 있다"며 "한 가지 더 주목할만한 것은 이 작품이 당시 방직재벌이었던 삼호그룹의 정재호 회장이 자택을 신축하며 대형 벽화용으로 주문 제작했다는 것인데 이를 통해 미술 문화가 꽃피우는데 후원자의 중요성을 다시금 새겨볼 수 있다"고 말했다. '여인들과 항아리' 우측 벽에는 김환기의 뉴욕시기 작품인 1973년작 전면 점화 '산울림 19-II-73#307'도 함께 내걸렸다.
이 작품은 김환기의 일기에서도 제작기를 살펴볼 수 있는 작품으로 점화 양식의 완성 단계를 보여준다.
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장은 "이건희 컬렉션의 특징은 동서고금을 망라하는 통섭형으로 한국의 예술사를 풍요롭게 해주는 품격있는 컬렉션"이라며 "그간 취약했던 근현대미술사 연구의 질과 양을 비약적으로 보강시킬 수 있는 20세기 초 희귀하고 주요한 국내외 작품들이 들어와 기쁘다"고 말했다. 국립현대미술관의 이번 전시는 내년 3월 13일까지 진행된다.
jhpark@fnnews.com 박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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