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변의 역사 ⑬>
'정사' 너머에 있는 역사
궁예 행적과 왕건 정변 전말
칠장사 명부전 궁예벽화
[파이낸셜뉴스]
"궁예 말년에 기병장수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등이 몰래 모의한 후 밤중에 함께 태조(왕건)의 집에 찾아와 왕으로 추대하겠다고 했다. 이에 태조는 단호하게 거절하며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때 부인 유씨가 손수 갑옷을 가지고 와서 태조에게 입히고 여러 장수들이 옹위(擁衛)하여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사람을 시켜 말을 달리며 '드디어 왕공께서 정의의 깃발을 드셨다'라고 소리를 외치게 했다. 이렇게 되자 뒤질세라 달려오는 자가 헤아릴 수 없었으며, 저 궁문에 이르러 북을 치고 환호하면서 기다리는 자도 1만 명을 넘었다. 궁예가 그 소식을 듣자 깜짝 놀라며 '왕공이 나라를 얻었다면 나의 일은 다 허사로다'라며 어찌 할 바를 몰라 하다가 미복 차림으로 북문(北門)을 빠져나와 달아나니 나인들이 궁궐을 청소하고 새 왕을 맞이했다. 궁예는 산골짜기에 숨어 이틀 밤을 머물렀고 보리 이삭을 몰래 잘라 먹다가 곧 백성들에 의해 맞아서 세상을 떠났다" -고려사 中
우리나라 역사에서 대중들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인물 중의 하나는 바로 '궁예'(弓裔)다. 드라마 등을 통해 애꾸눈과 미륵 관심법(觀心法)을 쓰는 궁예의 이미지가 대중들에게 강렬하게 각인돼있다. 그런데 우리나라 역사에서 궁예만큼 말기와 최후가 석연치 않은 상황에서 '폭군'(暴君)이라는 부정적 이미지가 완벽하게 덧씌워져 있는 인물도 드물 것이다.
그동안 왕건(王建)의 정변은 궁예의 폭정을 종식시키고 새로운 나라를 건국한 '혁명'(革命)으로 받아 들여졌다. 왕건은 고려 '태조'(太祖)라는 위대한 역사의 승자가 됐고, 궁예는 왕위에서 쫓겨나 일개 도적보다 못한 비참한 최후를 맞는 역사의 패자가 됐다. 일반적으로 받아 들여지는 소위 '정사'(正史)는 이 점을 한없이 부각한다.
하지만, 역사는 반드시 '정사'만을 고집할 수 없는 측면도 있다. 그것이 '승자'들의 관점 만을 기초로 실제 사실과는 다르게 기록됐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해당 역사의 전후 맥락과 일부 근거들을 기반으로 합리적으로 '추정'해보고, 항간에서 기록한 역사인 야사(野史)와 민담(民譚) 등을 살펴보는 것도 역사적 사실을 탐구해나가는 중요한 과정 중의 하나다.
이러한 측면에서 궁예의 석연치 않은 말기와 최후 행적, 그리고 궁예라는 인물과 왕건 정변의 본질 등을 살펴보는 것은 의미가 있고 필요한 일이다. 정사에 나온 기록들과 몇 가지 단서들에 기반한 합리적 추정 등을 아우르며 해당 역사를 되돌아봤다.
■군웅 할거, 후삼국 정립
9세기 말, 통일 신라는 쇠퇴하고 있었다. 50년 가까이 지속된 지배층 간의 내란(內亂)으로 왕권이 크게 약화됐고, 전국 각지에서 군웅(群雄)들이 할거(割據)하며 독자 세력화를 진행했다. 다양한 군웅들 사이에서 단연 두드러진 인물은 궁예와 견훤이었다. 특히, 궁예는 (정사에 따르면) 신라의 왕자(서자) 출신이었다. 그러나 궁예가 누구의 자식인지는 정확히 밝혀진 바가 없다. 다만, 신라 왕실 내부의 권력 다툼에 휘말려 어린 나이에 죽을 위기를 맞았고, 한 유비(乳婢, 젖먹이 비녀)에 의해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했지만 한 쪽 눈을 잃고 말았다.
이후 궁예는 10살이 될 무렵 세달사(世達寺)로 출가했고, 자신의 법호를 '선종'(善宗)이라고 했다. 이 시기 궁예는 불교 신앙을 현실 정치에 적용하는 기초를 닦은 것으로 보인다. 즉, 추후 '미륵 부처'를 자처하며 세력을 다져나가는 정치적 방향성이 이 때 '태동'(胎動)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891년, 궁예는 마침내 세달사를 떠나 반(反) 신라 기치를 내세우는 죽주(竹州, 현재 안성시 죽산면)의 호족 기훤 밑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오만한 기훤은 궁예를 제대로 대접해주지 않았고, 이에 분노한 궁예는 이듬해 기훤 곁을 떠나 북원(北原, 현재 원주)의 호족 양길 밑으로 들어갔다.
기훤과 달리 궁예의 능력을 알아본 양길은 궁예를 후하게 대접해줬다. 더욱이 별도 군사들까지 내줘 궁예가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줬다. 하지만 이는 호랑이에게 날개를 달아준 격이었다. 3000명이 넘는 군사들을 확보한 궁예는 병사 한 명 한 명을 자비롭게 대하며 큰 신망을 얻었고, 이를 기반으로 장군으로 추대가 되며 명주(溟州, 현재 강원도 강릉)에서 완전히 자립하는데 성공했다.
이후 부대 편제를 완료한 궁예는 본격적으로 세력을 확장해나갔다. 우선 895년에 태백산맥을 넘어 한산주(漢山州) 관내 10군현을 차지했고, 패서(浿西, 현재 예성강 이서 황해도) 지역의 호족들을 복속시켰다. 이 때 송악(松嶽, 현재 개성)의 유력한 호족인 왕건 가문이 궁예에게 귀부했다. 궁예는 이들에게 별도로 군사를 내줘 독자적으로 활동할 수 있게 했고, 왕건 가문은 출중한 능력 및 인지도 등을 바탕으로 여러 성들을 점령해 궁예의 세력 확장에 큰 몫을 했다. 자신감이 높아진 궁예는 898년에 수도를 기존 철원(鐵原)에서 송악으로 옮겼다. 비로소 궁예 세력은 국가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됐다.
한편, 궁예의 세력 확장을 우려스럽게 지켜보던 양길은 궁예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양길의 공격을 이미 예측했던 궁예는 이를 여유롭게 막아냈고, 오히려 역공을 가해 양길을 패배시켰다. 이에 따라 궁예는 양길의 지배 하에 있던 지역까지 장악했고, 그 세력 범위는 지금의 경기도, 충청북도, 강원도, 황해도까지 미치게 됐다. 통일 신라의 9주 중 고구려의 옛 땅 대부분을 지배하게 된 것이다.
한반도의 새로운 강자로 부상한 궁예는 마침내 901년 '고려'(高麗)를 건국했다. 이 때의 국가 명칭은 왕건의 고려와 구분하기 위해 '후고구려'라고도 부른다. 이에 앞서 900년에는 신라의 하급무관 출신이었던 견훤이 후백제를 건국했다. 비로소 후삼국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궁예의 고려 건국은 무엇보다 고구려 계승을 명확히 표방한 것이었고, 반 신라 기치를 드높인 것이었다. 견훤의 후백제 역시 백제 계승을 표방했고, 신라에 대한 복수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신정(神政), 반감의 증폭
고려를 건국 한 이후 궁예는 한동안 눈부신 성과들을 달성해나갔다. 정사에 따르면, 우선 903년에 궁예는 왕건을 시켜 금성(錦城, 현재 나주)을 공격, 점령했다. 나주는 후백제의 배후에 있던 전략적 요충지였다. 이듬해에 궁예는 국호를 마진(摩震)으로 바꾸고, 신라의 제도를 모방해 '광평성'(廣評省) 등을 설치하며 관제를 정비했다. 광평성은 내정을 통괄하는 최고중앙관서였고, 그 밑에 병부(兵部), 대룡부(大龍部), 수춘부(壽春部) 등을 둬 각각 사무를 분담했다. 특히, 광평성이 신라 시대 중요한 정책을 결정하던 귀족들의 회의체인 '화백'(和白)을 모방한 것이라고 봤을 때 이를 통해 국정에 호족 세력들의 입김이 만만치 않게 작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이 즈음 후삼국 통일 전쟁의 주요한 무대가 되는 공주의 장군 홍기가 투항하기도 했다.
이후 905년에 궁예는 다시 철원으로 수도를 옮겼고, 죽령의 동북 지역까지 세력을 확장했다. 또한 패서의 지배 구역에 대한 구체적인 조정을 통해 지배권을 확립한 결과 그 주변부에 있는 대동강 유역 호족들도 귀부하게 됐다. 이듬해인 906년에는 상주 사화진(沙火鎭, 현재 상주)을 점령함으로서 신라에 대한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909년에는 수군(水軍)을 통해 후백제 지역에 있던 진도 등을 점령했고, 3년 후에는 나주 일대에 대한 지배권을 완전히 장악하며 후삼국 통일 전쟁에서 후백제보다 우위에 서게 됐다.
이처럼 잘 나가던 궁예가 안 좋은 방향으로 변화하는 모습을 나타낸 것은 911년 국호를 태봉(泰封)으로 바꾼 이후였다. 정사에 따르면, 이 시기부터 궁예는 자신을 '미륵 부처'로 자처하며 본격적으로 '신정(神政)적인 전제주의(專制主義)' 정치를 행한다. 자신은 물론 아들들까지 신격화했고, 강론이나 행차할 때 그리고 복장 등에 있어서 미륵 부처로서의 위엄을 한껏 드러내 보였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관심법'(觀心法)이라는 전지(全知)적 수단을 동원해 신하들의 충성을 유도하고 공포를 유발했다고 전해진다. 관심법은 상대방의 몸가짐이나 얼굴 표정, 얼굴 근육의 움직임 따위로 속마음을 알아낸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궁예의 손에 죽임을 당하거나 위기를 맞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당시 대표적인 승려였던 석총은 궁예의 강설을 괴담(怪談)이라고 비난했다가 철퇴에 맞아 죽었고, 심지어 궁예의 부인인 강씨와 두 아들들도 관심법에 걸려 처참하게 살해됐다. 왕건 역시 반역의 혐의를 받았지만, 책사인 최응의 기지로 기사회생(起死回生)했다. 더욱이 전쟁 수행 등을 명분으로 백성들에게 과도한 세금을 부과해 민생이 어려움에 처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거병(擧兵)한 후 상당 기간 자애로운 지도자의 이미지를 가졌던 궁예가 어느새 정신적으로 미친 '폭군'으로 변질돼 있었다.
그 결과 대다수의 호족, 교단 승려들, 유학자들, 그리고 백성들이 궁예에게서 등을 돌렸고, 궁예 정권은 종간, 이흔암 등 특정 소수 세력에 의해 겨우 유지되는 모습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궁예의 대안으로 후삼국 통일 전쟁의 영웅이자 호족 세력의 '거두'(巨頭)라고 할 수 있는 왕건이 급부상하게 된다. 실제로 궁예 정권 말기에는 궁예의 쇠퇴와 왕건의 부상을 예언하는 '도참'(圖讖) 사상이 널리 퍼지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왕건 정변
마침내 궁예의 폭정을 더 이상 참지 못한 일단의 장수들을 중심으로 정변에 대한 모의가 시작됐다. 대표적인 인물들이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등이다. 사실상 왕건의 최측근들이나 다름 없었다. 이들은 궁예를 폐위(廢位)하고 왕건을 새로운 왕으로 추대할 것을 결의한 후 왕건의 집으로 찾아가 자신들의 뜻을 전달했다. 때는 918년 6월이었다.
하지만 왕건은 처음에는 단호히 반대했다. 그는 이를 왕에 대한 배신으로 봤던 것이다. 그런데 왕건의 부인 유씨(추후 신혜왕후)가 밖에서 엿들은 후 손수 갑옷을 챙겨와 왕건에게 말했다. "대의(大義)를 내세우고 폭군을 갈아 내는 것은 예로부터 그러한 일입니다. 지금 여러 장군들의 의견을 들으니 저도 의분(義憤)을 참을 수 없는데 하물며 대장부야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결국, 이에 설득된 왕건은 갑옷을 입고 장군들과 함께 밖으로 나와 정변을 단행했다. 정사에 따르면, 정변이 일어났을 때 왕건의 군사들 뿐만이 아니라 수많은 민중들도 궁궐 문 앞에 모여 북을 두드리며 궁예를 끌어내자고 소리쳤다고 한다. 이어 정변 소식을 전해 들은 궁예는 이렇다 할 저항 한번 해보지 않고 미복 차림으로 궁궐 북문(北門)으로 도망쳤다고 전해진다. 궁예는 얼마 안 가 백성들에게 잡혀 살해됐다. 이렇게 한 시대를 풍미했던 궁예는 비참하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고, 무혈입성(無血入城)한 왕건은 고려의 '태조'(太祖)로 등극하게 된다.
■궁예 진위 논란
그런데 궁예의 말기와 최후는 석연치 않은 점이 많아 지금까지도 역사학계에서 논란이 되고 있다. 이 같은 논란의 핵심은 궁예가 정말 미쳐버린 폭군이었냐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정사에 따르면 궁예는 초·중기에는 어진 정치로 인해 백성들의 신망을 한 몸에 받다가, 말기에 이르러 갑자기 폭군으로 돌변해 민심을 잃었고 신하와 백성들에 의해 비참한 최후를 맞는 것으로 묘사됐다.
그런데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말이 있다. 역사적으로 한 세력이 정변을 통해 권력을 잡으면, 그 세력은 정당성 확보 차원에서 전임자와 그 추종 세력을 왜곡하거나 격하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리고 이에 기반해 역사의 기록을 남겼고, 후대 사람들은 이 기록을 '정사'로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대표적으로 이성계와 혁명파 사대부들은 조선을 건국 할 때 고려 왕조 및 왕족들에게 이 같은 공격을 가했다. 바로 이러한 점이 궁예에게도 적용됐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즉, 왕건 쿠데타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것이 필요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전임자였던 궁예를 '인격 말살'시키는 것만큼 효과적인 것이 없었을 것이라는 추정이다.
이 같은 추정에 기반해 궁예에게 유리한 주장 및 근거들이 적지 않게 제기된다. 우선 궁예가 온전치 않은 정신으로 폭정을 일삼았고, 이에 신하들이 정당한 혁명을 일으켰다는 것부터가 의문이다. 한 때 살아있는 부처로까지 추앙받던 인물이 일순간 미치광이 폭군이 되는, 극과 극을 오가는 것이 쉽사리 이해가 되지 않는 측면이 있다. 이에 따라 단순히 정신적인 문제가 아니라 궁예의 왕권 강화 노력 및 호족 세력 등과의 권력 투쟁이 있었고, 여기에서 궁예가 패배해 왕위에서 쫓겨남에 따라 역사에서 평가절하됐다는 주장이 나온다.
특히, 궁예가 901년에 황해도 송악을 도읍으로 삼아 후고구려를 건국했다가 904년에 국호를 '마진'으로, 905년에 수도를 '철원'으로 옮긴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국호와 수도를 바꾼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궁예는 한강 하구와 인접한 요충지인 송악을 버리고, 굳이 물길이 희박하고 내륙 깊숙이 위치해있는 철원으로의 천도를 단행한다. 송악에 비해 상당히 열악한 입지를 갖춘 곳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궁예가 철원을 택한 이면에는 황해도를 중심으로 한 호족 세력과의 권력 투쟁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철원 천도 직전에 설치했던 '광평성'에서도 이와 관련한 단서를 엿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정적'(政敵)인 호족 세력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하는 곳에서 벗어나 궁예 자신에게 우호적인 세력 기반이 존재하는 곳으로 이동해 이른바 '새판 짜기'를 모색했다는 것이다.
반면, 궁예와 달리 기득권 세력인 황해도 호족 등에게는 철원 천도가 크게 불리한 일이었다. 무엇보다 자신들의 근거지가 수도에서 멀어지면서 이전에 비해 정치적 영향력 및 경제적 이권이 감소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궁예가 철원에 왕궁을 지으면서 호족 세력이 소유한 자금과 노동력 등을 대거 징발함에 따라 궁예에 대한 호족 세력의 반감은 극에 달했을 것으로 보인다. 궁예가 강하게 표방했던 고구려 계승 및 '북진'(北進) 정책 기조도 안정을 추구하는 보수적인 호족들에게는 부담이었을 수 있다.
궁극적으로 궁예는 이러한 것들을 통해 호족 세력의 기를 누르고 왕권을 강화하려고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관심법'도 왕권 강화를 위한 효과적인 수단이자 전략으로 동원된 측면이 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그러나 호족 세력은 궁예의 정책 기조를 견디지 못했고, 결국 자신들에게 우호적일 수밖에 없는 배경을 가진 왕건을 앞세워 '찬탈'(簒奪)을 도모했을 가능성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앞서 언급한 대로 잠재적 대권 주자였던 왕건은 황해도 송악에 기반해 있는 호족이었고, 궁예가 죽였다고 하는 왕비 강씨 역시 황해도 신천의 호족 딸이었다. 실제로 왕위에 오른 왕건은 궁예와는 달리 호족 세력을 적극적으로 포용하는 정책을 취한다.
궁예의 최후에 대한 의문도 제기된다. 앞서 언급한 정사에는 궁예가 저항 한번 해보지 못하고 비참한 최후를 맞는 것으로 나와있다. 하지만, 양길 휘하에 있는 평장군일 때는 '맹장'(猛將)의 면모를 유감 없이 보여줬고, 왕위에 올라서는 '정복군주'로서의 면모도 보여줬던 궁예가 그렇게 맥 없이 무너졌다는 것은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 측면이 있다. 더욱이 궁예의 추종 세력이 남아있었던 만큼, 여차하면 그쪽으로 몸을 피해 반격을 도모하는 것이 가능했을 수도 있다.
이런 가운데 오래 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민담'에는 정사와는 다른 이야기가 담겨있다. 바로 궁예가 왕건에게 크게 '항전'(抗戰)했다는 것이다. 특히, 당시의 기와가 발견되기도 한 포천의 보개산성(寶蓋山城)은 궁예가 왕건과 최후의 결전을 위해 쌓은 성으로 알려졌다. 또한 철원의 명성산은 '울음산'이라고도 불리는데, 이는 궁예의 친위부대가 왕건군에 밀려 최후의 보루로 삼고 항전하다 더 이상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궁예가 친위부대를 해산하면서 슬피 울었던 곳으로 전해진다.
아울러 전남 강진 무위사에 세워진 '선각대사비'(先覺大師碑)는 지금까지의 추정들에 힘을 실어주는 중요한 근거가 되고 있다. 선각대사비는 고려의 건국을 예언한 인물로 꼽히는 선각대사 형미의 행적을 기록해 둔 비석이다. 이 비석은 궁예와 왕건이 죽은 후인 946년(정종 1년)에 건립됐다. 다시 말해 고려 초에 세워진 것이다. 여기에는 후삼국 통일 과정과 고려 건국 비화도 담겨져 있는데, 왕을 뜻하는 의미인 '금상'(今上)과 '대왕'(大王)이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금상'은 '왕건'을 지칭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러면 도대체 '대왕'은 누구를 지칭하는 것인 지가 논란이었다. 처음에는 이 역시 왕건을 지칭하는 것이란 주장이 많았지만, 최근에는 궁예를 지칭한다는 것이 유력한 상황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굳이 금상과 대왕을 구분할 필요가 없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적어도 고려 초까지는 궁예가 단순한 폭군이 아닌 대왕으로 인정을 받았고, 이후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대왕에서 폭군으로 변질된 것이라는 추정이 나온다.
더욱이 이 비석에는 912년 대왕(궁예)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금성(나주)을 공격해 점령했다는 내용도 들어있다. 나주는 영산포 뱃길을 통하는 서남해안 지역의 물류 중심지였다. 이 곳을 손에 넣는 것은 후삼국 통일 전쟁에 있어 매우 중요한 과제였다. 그런데 그동안 나주 정벌은 왕건의 대표적인 업적으로 알려졌었다. 삼국사기(三國史記)나 고려사 등에는 궁예가 직접 참전한 기록이 없었다. 그러나 선각대사비의 내용을 기초로 하면, 나주 정벌은 왕건이 아닌 궁예의 업적이고, 기실 '정복군주'로서 궁예의 면모를 여과 없이 드러내고 있다. 결국 후대 사람들이 궁예를 격하하는 과정에서 이 같은 사실을 '인멸'(湮滅)했을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다만, 지금까지 언급한 주요 내용들은 객관적 사실이 아닌 몇 가지 단서들에 기반해 도출한 '추정'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역사의 전후 맥락 등을 감안할 때 충분히 숙고할 만한 가치가 있는 추정들이다.
■포용·통합 리더십, 후삼국 통일
918년, 정변을 통해 집권한 왕건은 국호를 고려(高麗), 연호를 천수(天授)라고 정했다. 이는 기본적으로 궁예의 고구려 부흥 및 북방 진출 의지를 계승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후 왕건은 잔존하고 있던 김순식, 이흔암 등 궁예 추종 세력을 척결하고, 조세 경감과 토지 제도 개선, 빈민 구제 등 민생을 안정시키는 데 주력했다. 또한 강력한 세력으로 존재하고 있는 호족들을 궁예처럼 적대하는 것이 아닌 회유, 포용하는 정책을 취했다. 이 정책의 핵심은 호족 세력과의 '정략 결혼'이었는데, 이에 따라 왕건은 무려 29명이나 되는 후궁들을 거느렸다.
어느 정도 기반을 닦은 왕건은 이듬해 1월 다시 송악으로 수도를 옮겼고, 후삼국 통일을 놓고 후백제의 견훤과 본격적인 전쟁을 준비한다. 당시 후삼국 통일전쟁 과정에 있어 왕건이 남다르게 표방했던 정책은 호족 세력에게 사용했던 '포용' 정책이다. 우선 왕건은 신라를 대하는데 있어 전임자였던 궁예 및 후백제의 견훤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을 보였다. 궁예는 신라를 이른바 '멸도'(멸망해야 할 도시)라고 부르며 경멸했다. 왕자였던 자신을 버렸으니 개인적인 원한도 상당했을 것이다. 신라의 하급무관 출신이었던 견훤 역시 시종일관 신라에 대해 적대적인 노선을 견지했다. 그러나 왕건은 기본적으로 신라라는 나라를 인정했고, 일부 신라 관제 차용과 포로 반환 등 유화적인 노선을 택했다.
특히, 927년에 견훤이 신라의 수도인 서라벌(경주)을 공격했을 때에도 왕건은 신라의 도움 요청에 적극 화답하며 대규모의 지원군을 신라로 파견했다. 하지만 강력한 견훤의 군대는 서라벌을 마음대로 유린했고, 당시 신라의 왕이었던 경애왕(景哀王, 제 55대 왕)을 살해했다. 이어 왕비를 모욕하고 허수아비 왕인 경순왕(敬順王, 제 56대 왕)을 세웠다. 더 나아가 견훤의 군대는 공산(公山, 현재 대구 달성군 팔공산)의 동수(桐藪)에서 왕건의 지원군을 궤멸시켰다. 이 전투에서 왕건의 충신이었던 신숭겸, 김락 등이 전사했고, 왕건은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했다. 비록 이 전투에서 왕건은 견훤에게 완패했지만, 신라와 경순왕의 확고한 지지 및 신뢰를 보장받게 된다. 이것이 발판이 돼 추후 935년에 경순왕은 고려에 자발적으로 투항했다.
왕건은 심지어 견훤도 포용하는 모습을 보였다. 공산 전투 이후 견훤은 왕건에게 자신을 '상부'(上府)로 우대할 것을 요구하는 등 기고만장했다. 한동안 통일 전쟁의 주도권은 견훤의 후백제에게 있었다. 그러다가 왕건의 고려군은 930년에 벌어진 고창(古昌, 현재 경상북도 안동)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며 마침내 전세를 역전시키는데 성공했다. 이어 왕건은 운주(運州) 전투에서도 승리해 이북 30여 성을 차지하는 큰 성과를 올렸다.
이 즈음 전세가 기울고 노쇠해진 견훤은 자신의 막내아들인 금강을 후계자로 지명했다. 그러나 이에 반발해 첫째 아들인 신검을 비롯한 다른 아들들이 들고 일어나 금강을 살해했고, 아버지인 견훤을 금산사(金山寺)에 유폐시켰다. 아들들에게 버림을 받은 견훤은 어쩔 수 없는 자구책으로서 몰래 탈출해 왕건에게 투항하는 길을 선택했다. 왕건은 견훤이 투항해오자 과거에 견훤이 요구했던 존칭인 '상부'라는 용어를 구사하며 견훤을 환대해줬다. 과거 공산 전투에서 견훤에 의해 자신의 충신들이 죽임을 당했지만, 왕건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적국의 수장이었던 견훤마저 품었다.
이후 왕건은 견훤을 앞세워 후백제 정벌에 효과적으로 나설 수 있었다. 이 때 신검이 이끄는 후백제군은 이전에 자신들의 왕이자 후백제의 건국자였던 견훤이 고려군을 이끌고 나타나자 사기가 급격히 떨어지는 모습을 보였다. 마침내 936년에 벌어진 일리천(一利川, 현재 선산) 전투에서 고려군이 후백제군을 대파하며 후삼국 통일 전쟁이 막을 내리게 됐고, 왕건은 고려를 건국한 지 19년 만에 후삼국 통일이라는 '대업'(大業)을 달성하게 됐다.
한편, 왕건은 불교 뿐만이 아닌 다양한 사상들도 포용했고, 최언위, 최은함, 최승로 등 종교와 사상을 초월해 인재를 고루 등용하기도 했다. 아울러 후삼국 통일 전인 926년에는 거란족이 세운 요(遼)나라에 의해 멸망한 발해(渤海)의 유민들을 대거 흡수했다. 결국, 고려라는 국가는 삼국(고구려, 백제, 신라) 통일 과정 등 이전의 우리나라 역사에서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었던 완전한 포용, 통합의 기반 위에 세워진 최초의 한민족 통일 국가였던 셈이다.
kschoi@fnnews.com 최경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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