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

"음악은 영화보다 느리지만 정제된 울림을 주는 힘 있죠"

오페라 '박하사탕' 예술감독 이건용
오페라로 돌아온 박하사탕
새단장한 국립극장에서 초연
원작 영화엔 없던 인물 만들어
삶과 죽음의 대결 순간 표현해
사람은 선하다기보다
선하기를 희망하는 존재
누군가를 위한 희생
결코 비현실적이지 않아
1980년 오월의 광주처럼

"음악은 영화보다 느리지만 정제된 울림을 주는 힘 있죠"
"음악은 영화보다 느리지만 정제된 울림을 주는 힘 있죠"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의 항쟁과 비극을 그리려는 많은 예술적 시도들이 있어왔죠. 하지만 그간 고통과 한풀이에만 주목해온 것 같았어요. 물론 눈물로 슬픔을 해소하고 한을 풀어내는 일은 필요하고 아직 완전히 해소되지 않은 부분들이 있죠. 하지만 여기서 더 나아가 승화해 표현하는 작품이 필요하다 느꼈어요. 오페라 '박하사탕'의 핵심이 거기에 있어요. 광주민주화운동 자체를 그려내는 것이 아니라 그 가운데 인물들에 집중하고 그 삶들이 일그러진 원인을 추적해가면서 과거의 경험이 드러나게 되는 작품. 이를 통해 작품을 접하는 전세계 사람들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것. 그것을 바라는 것이지요."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난지도 40년이 넘었다. 이후 이 역사적 사건을 두고 문학과 미술, 대중음악과 영화 등 수많은 예술작품들이 세상에 나왔다. 그 가운데 2000년 개봉한 영화 '박하사탕'은 높은 작품성으로 이를 연출한 이창동 감독을 한국 리얼리즘 영화의 계보를 잇는 감독으로 자리매김시켰다. 그리고 다시 2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이 작품을 바탕으로 한 창작오페라가 국립극장 무대에 오른다.

오는 27일과 28일 광주시립오페라단은 오페라 '박하사탕'의 초연 무대를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 올린다. 한국 오페라 역사상 한국 현대사의 중요한 사건을 2막7장의 그랜드 오페라로 만든 것이나 영화를 원작으로 한 오페라 제작 역시 최초의 시도다. 작품을 무대에 올리기까지 선두에는 이건용 예술감독(74·사진)이 있었다. 역사에 남을 작품을 위해 구슬땀을 흘리고 있는 이 감독을 지난 19일 국립극장 하늘극장에서 만났다.

이 감독은 "2019년 3월 그 이듬해 광주민주화운동 40주년에 맞춰 이와 관련된 작품을 만들자고 당시 광주시립오페라단 정갑균 예술감독과 조광화 연출을 만나 의기투합했는데 소재를 찾다보니 '박하사탕'이 적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제가 이창동 감독의 영화를 좋아하기도 해서 직접 이 감독에게 전화해 오페라로 만들고 싶다고 요청하고 허락을 받았다"고 밝혔다. 그해 7월 대본 초안이 만들어지면서 본격적인 작곡에 착수했다는 이 감독은 예상치 못한 복병 코로나19를 만났다. "지난해는 상황이 더 엄중했죠. 오케스트라 단원만 해도 70명이었는데 예상했던 6월 공연은 불가능했고 계속 기다리다 결국 지난 10월 연습 실황을 동영상으로라도 찍어 올려야겠다 했어요. 그런데 그게 반응이 좋았죠." 광주시립오페라단이 공개한 오페라 '박하사탕'의 영상을 2만명의 사람들이 찾아봤다. 예상했던 숫자보다 10배 넘는 이들이 시청을 하면서 높은 호응을 보이자 제작진도 다시 힘을 얻었다. "그렇게 다시 추진해보자 해서 온 게 오늘까지 왔네요."

작품의 대본을 바탕으로 악보를 만들고 가사를 써내려가는 작업은 1년이 채 안돼 마무리됐다. 이 감독은 "영화는 주인공 '영호'를 중심으로 돌아가지만 오페라 특성상 다채로운 캐릭터가 등장해야 했고 또 그들을 중심으로 한 서사와 노래가 어우러져야 하는 부분이 있었다"며 "원작 영화에 없던 새로운 캐릭터 여고생 간호반원 '명숙'을 창조해냈는데 이 작품의 대주제를 '삶과 죽음의 대결'이라고 봤을 때 '명숙'이 삶을 노래하는 인물로서 비중이 커졌다. 진압군과 시민군이 대치하는 혼란 속에서 발을 다친 영호가 명숙의 치료를 받은 후 느끼는 심리적 갈등을 표현하는 장면에서 이들이 노래를 하는데 이 부분이 작품의 절정이 되는 순간이었기에 더욱 신경써 작업했다"고 했다.

40여년 전 일어났던 역사적 사건이 20년 전 영화로 만들어지고 또 다시 20년의 세월을 거친 후 오페라로 재탄생하는 과정에서 현대와 조응할 수 있을까 의문도 생기고 있다. 이 감독은 "예술 장르마다의 역할은 조금씩 다른데 시 문학이 당대의 상황을 가장 먼저 함축적으로 표현해낸다면 이후 소설과 영화가 이를 세세하게 파헤쳐 묘사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음악은 이 장르들보다 조금 늦다"며 "음악은 어떠한 사건을 더욱 추상화시키고 이를 인간의 보편성과 연결해 마음을 울리는 장르다. 40여년이 지나 과거의 사건을 돌아볼 때 조금 더 정제된 상태로 바라볼 수 있게 오페라로 제작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한국에서 창작오페라를 한다는 것이 어찌보면 무모한 것이 아니냐는 이들이 있지만 한국의 뛰어난 성악가들을 계속해서 키워내고 살아남을 수 있게 해주는 장르이자 우리의 예술적 역량을 한데 모을 수 있는 가치 있는 장르가 오페라"라며 "한국어로 만든 오페라가 새로운 예술의 지평을 열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이 감독은 "당대의 숭고한 희생이 오히려 비현실적으로 다가오는 요즘, 분노로 가득차고 손해 하나 안 보려는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 다시금 스스로의 존재를 돌아보게끔 할 것"이라며 "나는 인간이 선하다고 생각하기보다 선하기를 희망한다. 이 작품을 통해 미래의 누군가를 위해 희생한 수많은 이들을 기억하고 울림을 줄 수 있길 바란다"고 힘주어 말했다.

jhpark@fnnews.com 박지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