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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원하는 대로 해드리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돌봄'이었다 [Guideposts]

아빠의 자리 베스 고몽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 나는 약속했다
"아빠는 이제 제가 돌볼게요"
지난해 2월 코로나 봉쇄가 시작되고
아빠는 안전한 피난처인 나의 집으로 왔다
정원을 가꾸던 아빠는 엄마와의 추억 깃든
고향집 마당을 간절히 그리워했다
하나님의 돌봄은 마음을 이해하는 일이다
프랭크퍼트로 돌아가는 아빠를 끌어안고
나는 마음이 담긴 작별을 건넸다

아빠가 원하는 대로 해드리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돌봄'이었다 [Guideposts]
아빠가 원하는 대로 해드리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돌봄'이었다 [Guideposts]
미국 인디애나주 파머스버그에 사는 베스 고몽(왼쪽)은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연로하신 아빠를 모시기 위해 자신의 집 별채에 별도의 공간을 꾸몄다. 그러나 93세의 아버지는 어머니와 70년을 함께 살아온 집을 떠나지 않으려 했다. 그런 아빠를 지켜보면서 딸은 그제서야 깨달았다. "아빠에게 가장 필요한 건 나의 집이 아니라 내 마음 안에 있었다"는 사실을.
몇 달간 상상해 온 순간이었다. 마침내 그때가 되었다.

"아빠, 마음에 쏙 드실 거예요." 차고에서 떨어진 자리에 우리가 겨우내 지은 별채의 문을 휙 열어젖히며 말했다.

"짜잔! 놀라지 마세요!" 남편 제프가 앉을 자리에 새 카펫을 깔아 두었다. 벽은 갓 칠한 페인트로 반짝였다. 대학생 딸 제스는 큼직한 실내용 화분 몇 개를 보탰다. 아빠가 글을 쓸 책상, 성경을 읽을 편안한 가죽 안락의자와 그에 어울리는 발받침도 있었다. 흠잡을 데 없군! 때는 2019년 3월이었고, 나는 플로리다까지 비행기를 타고 갔다. 아빠가 두 달간의 겨울휴가를 보내고 나서 인디애나에 있는 집으로 운전해서 돌아오는 걸 돕기 위해서였다. 93세인 아빠는 이제 장거리 운전이 편치 않았고, 나는 함께 보내는 시간이 좋았다.

어쨌든 차에 있는 내내 비밀을 간신히 지켰다. 비밀은 8개월 전, 돌아가시기 직전의 엄마와 했던 약속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괜찮을 거예요. 이제 제가 아빠를 돌볼게요."

내가 속삭였다. 엄마의 눈이 내 눈과 마주쳤고, 엄마도 이해했다는 걸 알았다. 하나님께서는 엄마가 평화롭게 세상을 떠나게 도울 기회를 내게 주셨다. 어떤 면에서는 약속을 지키는 게 엄마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지킬 의무처럼 느껴졌다.

부모님은 우리집에서 북동쪽으로 2시간 거리인 인디애나주 프랭크퍼트에서 살았다. 아빠는 목사이자 교구 관리자였으며, 그곳에서 풍요로운 삶을 꾸렸다. 은퇴하고 나서도 성경공부 모임을 이끌고, 바깥 출입이 어려운 이들을 찾아다니며 아빠 땅에 심은 나무를 가꾸고 돌보았다. 하지만 엄마가 안 계신 삶이란 예전 그대로일 수는 없었다. 두 분은 근 70년 동안 결혼 생활을 이어왔다. 아빠가 모든 일을 혼자 해내려고 애쓰는 건 원치 않았다. 그게 별채로 아빠를 놀라게 하는 계획의 장점이었다. 일단 별채를 보면 설득될 터였다.

"어때요?" 내가 물었다. 의자 위 벽에 내가 걸어둔 가족사진, 아빠의 옷을 기다리는 옷장, 책꽂이에 둔 엄마 사진 액자를 아빠는 구경했다.

"아름답구나. 그렇지만 이 모든 걸 날 위해 하지는 않았겠지? 손님용 방으로도 괜찮단다."

아빠의 미소는 입가에만 머물렀다. 찌릿하게 밀려오는 의심을 밀어냈다. 늦은 시각이었고, 우리 둘 다 장거리 운전으로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안녕히 주무세요, 아빠. 아침에 더 얘기해요."

아빠의 별채를 위해 남편이 자기 사무실을 포기하도록 설득하는 데는 상당한 노력이 필요했다. 그게 실수였을까? 지난가을 어느날 내가 찾아갔을 때 아빠는 살림 규모를 줄이는 가능성에 대해 언급했다.

아침 식사 중에 아빠는 아무 말 없이 시리얼의 바나나를 조금씩 먹었다. 아빠답지 않았다.

"침대는 편하셨어요?"

"아주."

"집에 갈 준비되셨죠, 그렇죠?"

나는 억지로 미소 지었다.

"그럼! 옛집이 잘 버티고 있는지 봐야지."

대답하는 아빠에게 갑자기 활기가 넘쳤다.

여행가방을 닫는 아빠를 바라보는데, 완전히 이곳으로 이사하시라는 얘기를 꺼내기가 두려웠다.

'곧 돌아오실 거야.' 혼잣말을 했다. 물론 아빠는 프랭크퍼트로 돌아가야 했다. 집도 매물로 내놓아야 하고, 친구들에게 작별 인사도 해야 하니까.

아빠의 차까지 따라나섰다.

"얼른 돌아오세요."

"그러마. 사랑한다."

아빠가 내 볼에 입 맞추며 말했다.

며칠 뒤, 아빠의 안부 확인차 전화를 걸었다.

"언제 다시 오실 수 있어요?"

"수요일에는 성경공부가 있고 이번주 주일학교에서 가르치기로 했어. 화요일에는 친구를 병원에 데려가야 하고. 그러고 나면 성경공부가 있구나."

93세인 아빠는 나보다 해야 할 일이 많았다.

"곧 돌아가마. 너희가 마련해 준 별채에서 쉬기를 고대하고 있단다."

아빠는 2주 후에 방문차 왔으나 고작 며칠이었다. 그리고 봉사활동, 정원 일, 성경공부로 몹시 돌아가고 싶어했다. 매달 그런 양상을 되풀이했다.

그해 여름 조카의 졸업을 축하하는 가족모임에서 내가 몇 달 동안 교묘히 피했던 질문을 남동생이 던졌다.

"아빠, 집을 팔고 누나랑 매형 집으로 이사하는 게 어떠세요?"

아빠는 철컥 소리를 내며 접시에 포크를 내려놓고는 한 단어씩 힘주어 말했다.

"아직 집을 팔 준비가 안됐어. 프랭크퍼트의 생활과 내게 의지하는 사람들이 있어. 너희 엄마와 함께한 추억도 거기 있고."

이게 아빠에게 얼마나 힘든지 이해했다. 내가 엄마를 보고 싶어하는 것보다 분명 천배는 더 엄마가 그리우실 거다. 그래도 나는 마음이 아팠다. 아빠를 위한 별채에 쏟은 그 모든 노고. 내 도움은 원치 않는다고 아빠가 말하는 것 같았다.

여름이 저물어 가을과 겨울이 되었고, 아빠는 몇 주마다 오셨다. 아빠가 더 낫고 편안하며 안전한 삶을 꾸리기 위해 딸에게 원하는 건 없었다. 별채도 당연히 아니었다. 아빠는 여느 때처럼 독립적이었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아빠가 양보한 한 가지는 우리 집에 오실 때 내가 프랭크퍼트까지 가서 모셔올 수 있게 한 거였다.

2020년 2월, 동부와 서부 해안 지역에서 사람들이 바이러스로 병들어 간다는 소식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노년층이 특히 그렇다고 했다. 인디애나 시골에서 한참 떨어진 세상 일 같았다. 매주 코로나19가 점점 더 가까이, 서서히 다가오는 걸 지켜보았다.

3월 말, 주지사는 인디애나주가 봉쇄에 들어갈 예정이라고 발표했다. 딸아이도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왔다. 모든 게 불확실한 채 집중 공격을 당하는 기분이었다. 한자리에 얼마나 오래 피신해 있어야 하는지, 감염을 피할 수 있는지, 음식은 구할 수 있는지. 화장실 휴지마저도 그랬다.

아빠에게 전화해서 봉쇄령이 시행되기 전에 모시러 가겠다고 전했다. 아빠의 옷을 챙기고 냉장고를 비웠으며 집에 있던 모든 화장실 휴지를 가져왔다.

집으로 돌아와서 우리는 함께 사는 생활에 적응했다. 아빠의 여느 방문과는 달랐다. 아빠는 좀 더 느긋해졌고, 우리 가족이 반복하는 생활의 일부가 되었다. 나도 좀 더 편해졌다. 아빠가 어디서 지내야 하는지 같은 질문은 이제 중요하지 않았다. 별채는 아빠가 혼자 성경을 읽고 친구들에게 전화하는 공간인 동시에, 가족과 가까이 있으면서 바이러스의 위협으로부터 안전한 피난처였다. 오직 하나님만 예견하실 수 있는 소용이었다.

나는 아빠가 유년기의 추억을 풀어놓게 하면서 아빠의 기억을 기록했다. 딸아이는 넋을 놓고 귀담아들었다. 둘은 그들만의 유대를 쌓았다.

날이 풀리고 아빠는 마당에서 일을 시작했다. 잡초를 뽑고 내 도구들을 깨끗이 닦았으며 도구창고 주변에 자갈을 고르게 깔았다.

어느 날 오후 아빠가 문으로 머리를 디밀고 얘기했다.

"다른 나무들과 줄이 맞지 않은 근사한 산사나무 묘목이 하나 있구나. 너희를 위해 옮겨 심어도 되겠니?"

"물론이죠."

아빠는 아빠 나이의 절반밖에 안 되는 사람의 에너지가 있는 것처럼 성큼성큼 걸어가 버렸다.

"기다리세요. 도와드릴게요."

내가 따라잡았을 때쯤, 아빠는 이미 나무 주변을 파고 있었다.

"제 차례예요."

아빠는 내게 삽을 건네며 어디를 파야 하는지 일러주었다.

"뿌리를 조심해."

다음 한 시간 동안 우리는 번갈아 땅을 파고 쉬었다. 마침내 뿌리를 느슨하게 조금씩 움직일 수 있었다.

"어디에 심고 싶니?"

아빠가 한 손으로는 나무를, 다른 한 손으로는 삽을 들고 물었다. 나는 기진맥진해서 창고에 기댔다.

예전 여름에 아빠가 주신 은행나무 두 그루 옆을 가리켰다. 30분 후 우리는 산사나무가 새로운 보금자리에서 기분 좋은 출발을 할 수 있도록 낑낑거리며 물통을 날랐다. 나무에 버팀목을 받치기 위해 아빠는 창고에서 철망과 장대를 찾았다.

엄마와 했던 약속을 떠올렸다. 나는 요리와 빨래를 하면서 은퇴한 아빠에게 마땅한 휴식을 선사하는 모습을 상상했다. 하지만 여기서 아빠는 나를 위해 일하고 계셨다. 봉쇄로 함께 살면서 좀 더 심오한 걸 깨달았다. 하나님께서는 돌봄의 핵심이 마음이 통하는 것임을 보여주셨다. 다른 사람을 위해 내가 해주고 싶거나 하고 싶은 일이 아니다. 그들이 필요로 하는 바를 이해하는 일이다. 우리 모녀는 서로를 위해 그 자리에 있었으며, 그건 아빠가 집으로 돌아가신 다음에도 이어지리라는 걸 알았다.

6주 후에 봉쇄가 끝났다. 아빠는 정원에 무얼 심었는지 얘기하면서 간절히 아빠의 마당으로 돌아가고 싶어했다. 제스가 운전해서 할아버지를 모셔다 드리겠다고 했다. 작별 인사는 시원섭섭했다. 아빠를 꼭 끌어안았다.

"사랑해요."

내가 말하는데 아빠의 팔이 날 더 꼭 안았다. 아빠에게 가장 필요한 건 내 집에 없었다. 그건 내 마음 안에 있었다.

'가이드포스트(Guideposts)'는 1945년 노먼 빈센트 필 박사에 의해 미국에서 창간된 교양잡지로, 한국판은 1965년 국내 최초 영한대역 잡지로 발간되어 현재까지 오랜 시간 독자들의 꾸준한 사랑을 받아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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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가이드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