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에 바친 반세기의 삶
1958년 개척교회를 시작으로
국내 넘어 亞·유럽서도 선교활동
40여년간 71개국서 말씀 전해
담임목사직 세습 않고 세대교체
조용기 목사(오른쪽)는 지난 2006년 11월 당회의 비밀투표를 거쳐 선출된 이영훈 목사에게 담임목사직을 물려주면서 리더십의 모범적 세대교체를 실천했다. 여의도순복음교회 제공
1936년 2월 14일 경상남도 울산 울주군에서 태어난 고 조용기 여의도순복음교회 원로목사는 한학과 전통적인 종교문화에 익숙한 가정에서 자랐다. 어수선한 해방정국이 이어지던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 입후보한 부친(조두천 장로)이 낙선한 뒤로는 가난한 사춘기를 보냈고 곧 6·25전쟁이 터지면서 부산에서 피란살이를 했다.
하지만 지독한 가난 속에서도 부산공고에 입학했고 학교에 주둔해 있던 미군부대에서 학교장과 미군 부대장 사이의 통역을 맡으면서 영어 실력을 키웠다. 모두가 힘들고 어려웠던 시기, 그 가운데서도 조 목사는 더 힘든 인생의 위기를 10대 때 맞이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폐결핵 선고를 받은 것이다. 현대에 비해 낙후된 의료 상황 속에서 당시 폐결핵에 걸렸다는 것은 사망선고를 받은 것과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병상에서 누나의 친구로부터 처음 복음을 접한 뒤 부산에서 미국의 오순절교단인 '하나님의성회' 소속 켄 타이스 선교사를 만나 집회 통역을 하면서 회심을 하고 이 과정에서 폐결핵이 치유되는 신유의 경험을 하면서 신학교 입학을 결심하게 된다.
■1958년 대조동서 천막 교회로 시작
이후 1956년 9월, 20세 때 하나님의성회 순복음신학교에 입학해 후에 장모이자 목회 동역자가 되는 최자실 목사와 만난다. 두 사람은 1958년 신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5월 18일 서울 대조동에 천막 교회를 개척했다.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시작이었다.
그 후 성장에 성장을 거듭하면서 조용기 목사와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위상은 국내를 넘어 세계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1964년 조용기 목사는 한국 하나님의성회 대표 자격으로 미국에서 열린 '미국하나님의성회 교단 50주년 기념식'에 참석한다. 이후 조 목사는 미주 지역을 중심으로 복음을 전했고 이를 바탕으로 이곳에 순복음 한인교회들이 세워지기 시작했다.
3년 후인 1967년 5월에는 세계오순절총회 아시아 대표 자격으로 영국의 웨스트민스터 센트럴홀에서 열린 부활절 예배에 참석하면서 유럽을 대상으로 한 복음 행보를 펼쳤다. 1973년 9월에는 제10차 세계 오순절 대회를 한국에서 주최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아시아 국가가 주최한 첫 오순절 세계 대회였다.
1973년 여의도로 교회를 옮긴 뒤 성장세는 더욱 가팔라져서 1979년에 10만명, 1981년에 20만명을 넘어섰다. 특히 1976년에는 세계교회성장기구인 'CGI(Church Growth International)'를 설립해 세계 교회 성장의 발판을 만들었다.
■지구 120바퀴 돌며 71개국서 부흥회 인도
1980년대부터는 아시아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1980년 복음화율이 1% 미만인 일본의 복음화를 위한 '일천만 구령 운동'을 시작했다. 도쿄와 오사카, 나고야 등 주요 도시에서 연이어 부흥성회를 인도하고 그해 7월부터 일본 깅키TV에서 '행복으로의 초대'라는 타이틀로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예배 실황을 방송했다. 1982년에는 필리핀 마닐라 아라네타 국립경기장에서 '마닐라 대부흥 성회'를 개최했는데 3만명 이상의 성도들이 참석했다. 이는 필리핀 기독교 역사상 최대 규모의 성회였다.
조 목사는 1992년부터 2008년까지 세계하나님의성회 총재를 역임하면서 제3세계 선교에 박차를 가했다. 이때부터 아프리카와 남미 등에서 대규모 성회를 인도하고 강력한 성령운동을 전개했다. 구 소련의 붕괴 후인 1992년 6월에는 모스크바에서 성회를 가졌고, 1997년 브라질 상파울루에서 가진 성회에서는 150만명이 운집해 두 나라에서 모두 개신교 사상 최대의 집회라는 기록을 세웠다. 조 목사는 1975년부터 2019년까지 지구를 120바퀴 돌며 71개국에서 최소 370차례 이상 부흥회를 인도했다.
조 목사는 국내에서 민족복음화운동에도 헌신하며 서울에서 제주까지 전국을 다니며 성회를 인도했다. 특히 사회 구원을 위해 1998년에는 일간지 국민일보를 설립해 기독교의 목소리를 우리 사회에 전하기 시작했다. 1999년에는 비정부기구(NGO)인 사단법인 선한사람들(현 굿피플)을 세워 국내 및 해외에서 인권·환경·보건 및 아동복지 등의 증진에 앞장섰으며 그 공로로 1982년 '대통령 표창'(홀트 학교 건립기금 및 장애아동 복지사업)을 수상했다. 또 1994년에는 대한적십자사부터 '적십자헌혈유공자 금장', 1996년에는 심장병어린이 무료시술 지원 및 소년소녀가장 돕기 헌신으로 '국민훈장 무궁화장(보건복지부)'을 받았다. 2005년에 미국 뉴욕기독교교회협의회로부터 '더 패밀리 오브 맨 메달리온'을 수상했고 2007년 미연방의회에서 '자랑스런 한국인 인증서'도 받았다. 또 2009년에는 캄보디아 정부가 주는 훈장을 수상했다.
■담임목사직 세습않고 '아름다운 은퇴'
조 목사는 한국 교회사 가운데 아름다운 세대 교체를 이뤄낸 것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2005년 조 목사는 "만 70세가 되면 은퇴하겠다"고 공표하고 후임자 선임을 민주적이고 교회법에 따라 공평하게 처리하고자 했다. 하지만 성도들의 간곡한 요청으로 시무 연장을 수락하고 2006년 1월 "시무 연장을 3년으로 하고 후임목사를 선출회 공동목회 한 후 물러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후 제2대 담임목사 선정을 위한 준비위원회가 구성됐고 후임 담임목사 후보들의 민주적 절차에 따른 추천과 성도들의 투표 과정을 거쳐 2009년 2월 이영훈 목사에게 담임목사직을 승계했다.
조 목사는 저술가로서도 활발하게 활동했다. 그의 저서로는 '4차원의 영성' '4차원의 영적 세계' '나의 교회성장 이야기' '어떻게 기도할 것인가' '오중복음과 삼중축복' '성령론' '신유론' '나는 이렇게 기도한다' '이것이 믿음이다' '희망목회 45년' 등 수백권이 있다.
jhpark@fnnews.com 박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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