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박원순 서울 시장이 사망한 지 벌써 일년이 지났다. 국가인권위에서 성희롱으로 판명이 나고 사건이 일단락된 것 같았는데 최근 유족과 피해자 간의 공방이 재점화되고 있다. 근데 이상하게도 주변에서는 피해자 변호사의 정치적 배경에 대해 궁금해한다. "그녀가 여당 지지자냐? 야당 지지자냐?" 필자는 피해자의 변호사와 이전에 같이 근무한 적이 있어 그녀의 소신과 진정성을 알고 있다. 자신 있게 "그녀는 여당도 아니고 야당도 아니고 피해자당에요." '피해자당'이라는 생각지 못한 대답에 다들 웃기는 했지만 내 말을 믿지 않는 눈치였다. 왜 믿지 않을까? 그것은 그동안 젠더문제를 제기하면서 사회의 주목을 받은 분들이 여당이든 야당이든 정치권과 관련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가 모든 이슈를 내 편 네 편 즉 정치적으로 보는 습관이 들어버려 참으로 우려가 된다.
그러나 요즘 청년층에서는 정파와 상관없이 젠더를 주요한 사회문제로 인식하고 있다. 한 달 전쯤 서울에 있는 모 대학 학생회에서 e메일이 왔다. 교육, 인권, 젠더, 경제, 역사, 외교 안보, 불평등·공정, 문화, 언론, 복지 총 10개 분야에 걸친 콘퍼런스를 개최하는데 젠더를 주제로 발표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시간이 안 맞아서 참여하지는 못했지만, e메일을 읽자마자 드는 생각이 젠더문제가 우리 사회 10개 주요 분야의 하나에 들어갈 만큼 청년들에게는 주요한 관심사라는 점이다.
눈치 빠른 정치권이 이런 점을 알아버린 것일까? 요즘 특히 젠더 이슈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이는 여당과 야당 다 마찬가지이다. 몇 달 전 야당 대표와 몇몇 대선주자는 뜬금없이 여성할당제와 여성가족부 폐지를 들고나오면서 젠더 갈등을 들쑤셔놓았다. 여당 일부에서도 남녀평등복무제, 남성 역차별 해소 등을 내세우며 청년 남성 입맛에 맞는 공약을 내걸었다. 더구나 일부 여당 정치권에서는 성폭력 피해자에 대해 피해 호소인이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가면서 피해자를 우롱했다. 그중에는 여성문제 전문가로 자타가 인정하는 여성 국회의원들도 있었다. 누가 보아도 피해자보다는 진영논리가 앞서고 있음이 뻔하게 보인다.
최근에 공공정책전략연구소에서 추진한 정책좌담회에 참여했다. 그 행사에서 다시 한번 세대별, 직종별로 젠더문제가 잔존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함께 참석한 신지예 한국여성정치네트워크 대표는 많은 여성 청년들이 디지털을 포함한 각종 성폭력에 대한 불안이 심각하다고 말했다. 워킹맘들에게는 일과 가정의 양립의 어려움, 경력단절의 위기는 발등에 떨어진 불이다.
또 젠더 갈등의 이면에는 청년 취업의 어려움, 경제난, 터무니없는 아파트값 상승 등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가 있다.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하여 힘을 합쳐야 할 정치권에서 오히려 갈등을 증폭시키는 행위는 사회의 발전에 도움이 안 된다. 아직 유리천장지수가 전 세계적으로 하위인 우리나라에서 여야 없이 한목소리를 내기를 바란다.
누가 갈등을 이용하는지 국민은 다 보고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젠더문제를 이용해서 이득을 보려고 한다면 결국에는 젠더문제로 발목을 잡힐 것이다. 내가 미치는 영향력은 결국 돌고 돌아 본인에게 돌아가기 때문이다.
이복실 전 여성가족부 차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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