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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가정이라는 꿈, 그것을 내려놓았을때 비로소 행복해지다 [Guideposts]

일과 가족 사이의 균형 브리아나 벨
일하는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내게 안정적인 가정은 갈망이었다
성직자 남편을 만나 아이들을 키우며 꿈을 이뤘다 생각했지만 불행했다
양육 이상의 욕망이 마음속에서 일었다
해결책은 아이들을 보육시설에 맡기고 프리랜서 기자가 돼 글을 쓰는 것
내 삶은 분주하고 충만해졌다
비록 완벽한 엄마, 아내는 아닐지라도 한걸음씩 나아가고 있음을 안다

완벽한 가정이라는 꿈, 그것을 내려놓았을때 비로소 행복해지다 [Guideposts]
홀어머니 아래서 성장한 브리아나 벨은 언제나 '안정적인 가정'을 꿈꿨다. 그러나 세 아이의 엄마와 전업주부로서의 삶이 늘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가정과 일의 균형을 맞춰가면서 차츰 불안감을 줄여나갔다. "나는 자라면서 빨리 회복하는 법을 배웠다. 하나님께서는 삶의 단계마다 계셨으며 앞으로 나가게끔 도와주셨다"고 그녀는 말했다.
스물일곱 살이던 나는 줄곧 원하던 삶을 살고 있었다. 어쩌면 내가 원한다고 생각했던 건지도 모른다.

나는 청년부 목사와 결혼했다. 우리에게는 두 딸이 있었고 나는 셋째 딸을 임신 중이었다. 남편 대니얼은 교회에서 바빴고 우리 가족은 신도들의 사랑을 받았다. 우리는 내가 자라면서 우러러보던 청년부 가족과 비슷했다. 가사에 전념하는 엄마와 밝은 아이들이 있고 교회 일에 참여했다.

친정은 정반대였다. 아빠는 엄마가 날 임신했을 때 집을 나갔다. 엄마는 장시간 일했지만 필수품 외에 많은 걸 살 여유가 없었다. 나는 자칭 '예수 그리스도 마니아'로 일요일마다 혼자 교회에 출석했다. 중학교 친구들과 함께 신도석에 앉았는데, 내 주변의 어느 한 가족에 속하기를 간절히 바랐다. 오랫동안 지금 내게 있는 그런 가족을 주십사 기도드렸다.

그런데 어째서 불행하지?

세번째 임신으로 감정적으로 힘들다거나 최근에 임신성 당뇨 진단을 받아서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스스로 목사의 아내와 전업주부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느꼈다. 어렸을 때 청년부에서 기억하는 느긋하면서도 의욕적인 엄마들의 모습은 고사하고, 아이들과 집에서 보내는 나날은 소셜미디어에서 본 활기차고 상상력 넘치는 가족과는 하나도 닮지 않았다.

남편의 목회 활동을 돕고 싶었지만, 나는 그가 하는 일이 시간이 많이 든다는 데 점점 더 골을 내고 있었다. 남편이 따로 시간을 내어 신학 석사 공부를 하는 건 말할 것도 없었다. 남편의 일은 대부분 오후, 저녁, 주말에 있었는데, 바로 그때가 내 기력이 달려서 남편의 도움과 동료애를 간절히 바라는 때였다.

나는 대학에서 커뮤니케이션을 공부했는데, 아이들이 태어나고 나서 직업적 글쓰기를 이렇게나 그리워할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양육의 의무가 커질수록 파트타임으로 일하면서 남편의 얼마 되지 않는 수입을 보충할 수 있기를 더욱더 바라게 되었다.

우리 가족은 내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었다. 왜 나는 감사하지 못할까? 내 문제가 무엇일까?

당뇨 진단을 받았을 때 모든 것이 곪아서 터질 지경에 이르렀다. 정례적인 혈액 검사가 정상보다 높은 당 수치를 보였다. 의사는 당장 검사가 더 필요하다고 했다.

대니얼은 교회에서 청년부 행사를 감독하고 있었다. 남편에게 얘기하려고 전화를 걸었으나, 지켜보는 사람 없이 행사장에 아이들을 남겨두고 남편이 자리를 뜰 수는 없었다.

네 살 페니와 두 살 조지아가 자야 할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딸들과 있어 줄 친구 하나를 구했고 또 다른 친구인 로렌이 날 병원에 데려갔다.

"이럴 때 남편이 여기 있으면 좋겠어." 내 말에 친구가 손을 꽉 잡아 주었다.

그날 밤늦게 돌아왔을 때도 남편은 여전히 집에 없었다. 무언가 바뀌어야 한다는 걸 알았다.

"왜 최소한 병원으로도 오지 않았어요? 이런 건 내가 우리 가족이라고 생각했던 모습이 아니에요."

남편이 왔을 때 쏘아붙였다. 대니얼은 나를 안고 미안하다고 했다. 남편이 책무를 감당하느라 얼마나 시달리고 있는지 그의 목소리에서 알아들었다. 남편을 탓하는 게 부당하다는 걸 알았다. 내가 언제나 원하던 삶이 날 불행하게 하는 건 남편의 잘못이 아니니까. 나는 문제를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지조차 몰랐고 내가 문제를 제기할 때 닥칠 일이 두려웠다.

대니얼이 아빠처럼 날 떠나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그저 일하려고 가족의 균형을 뒤집는다면 남편이 화를 내지 않을까? 내가 가족보다 일을 우선한다면 하나님을 공경하는 걸까?

아빠는 한 번도 딱히 미더운 적이 없었다고 엄마가 말했다. 내가 태어났을 땐 엄마와 나뿐이었다. 내가 태어날 무렵 한동안 엄마는 외조부모님 집으로 들어갔다. 주말과 방과 후 시간을 자주 할머니 할아버지와 보냈다. 엄마는 기차역 역무원으로 종종 저녁과 주말에도 일했지만 돈은 빠듯했다. 모든 것이 불안정했다.

내가 갈망하던 안정감을 교회 청년부에서 찾았다. 엄마는 날 방학 성경 학교에 등록했고 나는 꾸준히 출석했다. 내 가족도 청년부 가족과 비슷하기를 바랐다. 부모 두 사람에 엄마는 집에 있고 경제적으로 안정되어 있으며 교회 일에 참석하는 모습. 하나님께 그런 가족을 주십사 기도했다.

대니얼의 가족과 비슷한 가족 말이다. 우리는 대학 재학 중에 만났다. 대니얼의 아버지는 사업체를 꾸렸고 어머니는 집에 있으면서 세 아이를 키우고 집안일을 보살폈다. 대니얼과 친구들은 그 집에서 어울려 놀면서 냉장고를 비우고 소파에서 빈둥거리며 TV를 봤다.

남편의 유일한 반항은 기독교 신앙을 부모님보다 엄격하게 받아들인 거였다. 그에게 전통적인 가족은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의 일부였다. 내게 가족은 언제나 원하던 안전한 항구였다.

결혼하고 넉 달 후에 페니를 임신했다는 걸 알았다. 우리의 완벽한 가족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하지만 내 이상(理想)이 시들해지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신입 목사로서 남편은 보수가 적고 밤낮으로 시간을 내야 했다. 우리는 지하 아파트에 살면서 간신히 식료품을 샀다. 혼자라는 기분이 들면서 끝없이 녹초가 되었다.

페니가 5개월이 되었을 때 강아지처럼 입혀서 교회 핼러윈 축제에 데려갔다.

"대니얼은 어디 있어?"

친구가 물었다. 친구의 남편은 아기를 안고 있었다.

"대니얼은 여기서 축제를 돕고 있어. 정확히 어딨는지는 모르겠고."

그날 늦은 저녁, 우리는 카시트에서 잠든 페니를 두고 여전히 교회에 있었다. 다른 가족들이 귀가해서 아이들을 침대에 눕히고 난 한참 후에도 나는 난장판을 치우는 걸 도왔다. 아기를 안고 있던 친구의 남편이 계속 떠올랐다.

남편이 다른 교회에서 청년부 목사 일을 구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둘째딸 조지아가 태어났다. 남편의 새로운 일은 훨씬 더 고됐다. 청년부는 규모가 컸고 대니얼은 함께하는 학생들을 위해 높은 희망을 품었다. 매일 아침 집을 나섰고 때로는 밤이 늦도록 집에 오지 않았다.

내 안에 안달복달하는 마음이 쌓였다. 내가 갈망하던 가족의 핵심은 아이들과 함께 집에 있는 엄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서는 양육 이상의 일을 하고 싶었다. 프리랜서 기자가 되고 싶었다.

소망을 현실로 이루려면 모두가 변해야 했다. 위험 부담이 커 보였다. 어떻게 하나님께서 이미 마련해 주신 바에서 등을 돌리고 도와달라고 기도드릴 수 있겠는가?

프란체스카라는 교회 사람과 친구가 되었다. 프란체스카는 두 아이를 둔 그래픽 디자이너였다. 출산 휴가 후에 직장으로 복귀하지 말라고 친구를 설득하려 했다. 친구 없는 날들을 견딜 수 없었다. 프란체스카는 일하는 걸 즐긴다고 했고, 나는 친구의 두 아이가 보육 시설에서 잘 지낸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프란체스카의 일 얘기를 들으며 그녀가 가정에서 찾지 못하는 어떤 것을 직장에서 발견했음을 알았다.

"우리는 왜 당신만 일할 수 있다고 정했을까요?"

어느 밤에 식기세척기에 그릇을 넣으며 남편에게 물었다.

"당신도 당연히 일할 수 있어요. 그저 보육시설이 너무 비싸서 그렇지요."

남편의 대답이었다. 대니얼은 전에도 내게 글을 쓰라고 권했지만 이번에는 좀 더 직접적인 제안 같았다. 우리는 합의를 봤다. 아이들이 낮잠 자는 사이에 나는 글을 쓴다. 내가 돈을 벌면 보육비를 감당할 수 있을 거다. 기사 몇 편을 팔았고 일주일에 이틀씩 딸들을 보육시설에 보내기로 결정했다.

그러다가 엘로이즈를 임신했다. 하나님께서는 내게 일을 그만두라고 말씀하시려는 걸까?

엄마를 떠올렸고 엄마가 일하는 동안 누가 날 돌볼지를 두고 엄마가 고심하던 게 기억났다. 결국 나는 엄마에게 스스로 챙기는 편이 더 편하다고 얘기했다.

우리 모녀는 가까웠지만, 관계는 복잡했다. 내가 '정상적인' 가족이 있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걸 들을 때마다 엄마는 상처를 받았을 게 분명했다.

홀로 보내던 그 모든 오후를 떠올렸다. 어떻게든 상황은 굴러갔다. 나는 청년부를 찾았고 대학에 진학했으며 대니얼과 결혼했다.

나는 자라면서 빨리 회복하는 법을 배웠다. 하나님께서는 내 삶의 단계마다 계셨으며 내가 앞으로 나가게끔 도와주시고 힘든 일이 있을 때도 날 사랑하셨다. 내가 나 자신에게 부여한 기대는 신앙보다는 공포에 뿌리내리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가장 좋아하시는 메시지는 "두려워하지 말라"임을 기억했어야 했다.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께 귀를 기울이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엘로이즈는 건강하게 태어났다. 엘로이즈가 돌이 되자 반일 보육시설에 등록하고 매일 글을 썼다. 점차 프리랜서로서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을 수 있었다. 아이들은 잘 지냈고 내 삶은 친구 프란체스카와 비슷하게 분주하고 충만해 보이기 시작했다.

대니얼은 우리 교회의 다른 지부에서 주임 목사로 승진했다. 대니얼에게 그가 자랑스러우며 돕고 싶다고 얘기했다. 또한 "목사의 완벽한 아내가 되기 위해 압박감을 느끼고 싶지는 않아요"라고도 말했다. "당신한테 절대 그런 거 바라지 않아요." 남편이 말했다.

우리는 여전히 성직자 가정으로서 일과 가족, 교회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알아 가는 중이다.
이제는 그 과업이 훨씬 더 수월해졌기에 두려움이 내 생각을 이끌게끔 내버려 두지 않는다. 그건 내가 바란다고 줄곧 생각했던 삶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신 더 나은 삶이었다.

글·사진=가이드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