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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초포럼] 오필리어의 하소연

[서초포럼] 오필리어의 하소연
오필리어: 오라버니의 이 좋은 말씀 내 마음에 소중히 간직할게요. 하지만 오라버니, 염치없는 목사님들처럼, 천국 가는 가파른 가시밭길로 나를 이끌어 놓고, 자신은 분별없는 탕아처럼 환락의 길을 밟으며, 자신이 말한 설교는 거들떠보지도 않는 그런 짓은 마세요.

셰익스피어의 '햄릿'의 오필리어는 덴마크의 중신(重臣) 폴로니우스의 딸로서 왕자 햄릿의 연인이다. 여기서 오필리어는 먼 유학길에 오르는 오빠가 누이에게 여성으로서 행동을 조심하라고 주문하자 이에 답하고 있다. 이는 분명히 이중잣대에서 비롯된 당부이다. 남성인 오빠는 하고픈 대로 환락의 길을 갈 것이고, 오필리어에게는 험난한 가시밭길만이 허용될 것이기 때문이다. 오필리어는 자신의 주체성이나 감정을 고려해주지도, 허용해주지도 않는 남성중심 사회에서 도구로서만 존재한다.

이 작품에서 셰익스피어는 오필리어를 일차원적으로 단순하게 제시하지만, 그녀의 삶의 모습을 상상해보자. 오필리어는 거친 세파를 모르고 자란 매우 순진하고 착한 여성이다. 어머니를 여읜 그녀를 아버지와 오빠가 끔찍이 아껴주어 보호해주니 굳이 험난한 세파에 휩쓸릴 이유도 없다. 그녀는 햄릿을 무척 사랑하지만 아버지가 햄릿을 만나지도, 편지도 받지 말라고 하자 햄릿을 배신하고 아버지의 말에 순종한다. 아버지의 주문에 따라 햄릿에게 거짓말을 하지만 이 또한 아버지의 말을 거역할 줄 모르는 그녀의 천성 때문이다. 햄릿이 그녀의 위선에 실망하여 악담을 하여도 그녀는 햄릿을 사랑하기에 이를 견디어낸다. 그녀는 햄릿에게 버림받고, 심지어는 아버지가 햄릿에 의해 고의적이지는 않았지만 죽임을 당하였으나, 그저 이를 감내하려 애쓰다 정신이상자가 된다.

그녀의 삶을 주관해왔던 아버지가 죽고, 오빠는 유학 가버리고, 연인인 햄릿마저 그녀를 멀리하자 외톨이가 된 그녀에게는 의존할 수 있는 기둥이 사라져버렸다. 연약한 오필리어는 험난한 세파의 물결을 견디지 못하고 제정신이 아닌 상태가 되더니 물에 빠져 유명을 달리하는 비극으로 생을 마감한다.

최근 상영됐던 조선왕조의 정조와 후궁 성덕임의 사랑을 다룬 연속극 '옷소매 붉은 끝동'에서 덕임은 극의 말미에서 왕께 자신의 소망을 얘기한다. "부디 다음 생에서는 신첩을 보시더라도 모르는 척 스치고 지나쳐 주옵소서. 전하를 원망하는 것이 아니옵나이다.
미워하는 것도 아니옵나이다. 그저 다음 생에는 신첩이 원하는 대로 살고 싶은 것이옵니다."

여성이자 후궁이라는 멍에 속에 갇혀 원하지 않는 삶을 살아야 했던 덕임은, 정조의 사랑을 전적으로 받았지만, 누리지 못했던 주체로서의 삶을 내세에서라도 누리고 싶은 소망을 표현한 것이다.

남성중심 사회에서 소외되어 자신의 고유한 목소리를 내볼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감내하다가 도저히 견딜 수 없어 비참하게 삶을 마감해야 했던 오필리어는 어떤 생각을 하며 세상을 하직했을까? 그녀가 저승에서 햄릿을 만났다면 불행했던 자신의 이승에서의 삶을 무엇이라 하소연했을까? 오필리어는 성덕임보다도 더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생을 마감했으니 훨씬 더 원망에 가까운 하소연을 하지 않았을까?

변창구 경희사이버대 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