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성(保守性). 원전설계 전체를 관통하는 설계철학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정치이념과 무관하고 용법조차 다른 이 단어는 안전성이 보장돼야 하는 공학설계의 시작과 끝이다. 우리 원자로 설계자들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현실보다 나쁜 시뮬레이션 결과를 만들고, 그 속에서도 안전성을 보장한다. 절대 예측이 현실에서 틀리지 않기 위해서다.
필수재인 전력수급 예측도 마찬가지여야 한다. 그러나 지난 정부의 제8차, 제9차 전력수급기본계획은 탈원전에 매몰된 나머지 의도적으로 소비예측을 줄였고 결과적으로 전력수급 예측에 실패했다. 탈원전 및 신재생에너지 중심의 에너지 전환은 안정적으로 대용량 전력공급이 불가능하며 탄소중립 달성, 에너지 안보 차원에서 한계를 명확히 보였다.
그런 의미에서 지난달 30일 발표된 신정부의 제10차 전기본 실무안을 통해 본격적인 원전 활용에 대한 행정적 근거가 확보된 것은 고무적이다. 이 실무안에는 신한울 3·4호기 건설, 계속운전 추진 등을 통해 2030년 원전 활용도를 30% 상향하는 방안이 포함됐다. 신재생에너지 비중은 현실적으로 조정됐다. 설비용량 기준 신재생에너지 설비는 올해 28.9GW와 2030년 71.5GW, 2036년 107.4GW로 추산했다.
원전의 활용 확대와 함께 보수적으로 해결할 시급한 과제는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약 1만8000t의 안전한 관리다.
고준위 방사성폐기물은 현재 원전 내 건식저장시설에 저장돼 있으나 현 시설로는 2030년 이후부터 차례로 포화될 예정이다. 저장시설 확충 없인 국내 전력공급의 30% 전후를 맡고 있는 원전 가동에 차질이 생길 수 있다.
무게로 들으면 놀랍지만, 이는 기술적으로 충분히 해결이 가능하다. 높은 밀도의 사용후핵연료가 필요로 하는 저장공간은 제한적이고 저장에 관한 검증된 기술도 상당수 확보됐기 때문이다. 다만 과학계, 산업계의 기술적 노력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
먼저 정부의 정책적인 노력이 중요하다. 지난 두 번의 정부에서 확정된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관리 기본계획'의 차질 없는 이행을 위한 특별법을 조속히 제정해야 한다. 과학계는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R&D 기술로드맵'을 바탕으로 최고의 기술력 확보, 안정적 부지 조사·연구 등을 통해 국민이 안심할 수 있도록 역량을 확보하고, 국민을 설득하는 등 전문가로서 책임 있는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산업계 역시 세계 최고의 제조 역량을 활용, 안전한 방폐장 건설과 설비 제조를 통해 국민 신뢰 확보를 위해 노력해야만 한다.
현대사회에서 전기는 소통의 매개이자 복지의 원천이다.
국민이 풍요롭고 깨끗한 미래를 영위하기 위해서는 원전 활용이 필수적이고,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처분장도 반드시 필요하다. 국민의 관심과 정부와 산학연의 유기적 연계로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문제는 분명 해결할 수 있다. 전기로 우리는 연계할 것이다.
김지희 한국원자력硏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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