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4번째로 개발에 성공한 2조7000여억원짜리 국산 고속철도차량 기술이 제대로 결실을 맺기도 전에 시장에서 사장될 위기에 처했다"
철도차량 부품 업체들이 해외 업체의 국내 고속차량 시장 진출을 규탄하고 정부의 정책적 지원을 호소하고 나섰다.
철도차량 부품산업 보호 비상대책위원회는 14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국내 철도차량 부품산업 보호를 위한 궐기 대회’를 열고 “정부는 국내 고속차량 입찰에 해외 업체의 무분별한 진입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며 이 같이 밝혔다.
이번 집회에는 수도권과 경인·영남 등 전국 각지에서 모인 191개사 철도차량 부품업체 소속 노동자 550여명이 참여해 해외 업체의 국내 고속차량 입찰 진입을 반대하며 제도 개선을 위한 목소리를 높였다. 이들은 부품 업체들의 서명이 담긴 ‘국내 철도부품산업 발전을 위한 제언’ 호소문도 이날 국회에 전달했다.
비대위는 스페인 철도차량 제작사인 ‘탈고(TALGO)’가 국내 철도차량 제작사인 A사와 컨소시엄을 맺고 올해 하반기 중 입찰 공고 예정인 한국철도공사(코레일)가 발주한 136량짜리 ‘동력분산식’ 고속차량 EMU-320 입찰 사업에 참여할 것으로 예상됨에 따라 이를 규탄하기 위해 집회를 열었다.
탈고는 동력집중식 고속차량 제작 업체로 코레일이 입찰에서 요구하는 ‘동력분산식’ 고속차량 제작·납품한 실적은 전무한 상태다. 하지만 국내 입찰 시장에 참여하기 위한 자격요소 문턱이 낮아지면서 아무 제재없이 입찰에 참여할 수 있게 됐다는 것이 이들의 지적이다.
부품 업체들은 집회에서 “유럽이나 일본 등 철도 선진국들은 국가 미래성장동력으로 꼽히는 자국의 고속차량 기술 보호를 위해 시장 입찰 자격 조건을 제한하는 등 빗장부터 앞 다퉈 걸어 잠그고 있다”며 “그러나 한국은 이와는 반대로 입찰 자격 요건을 오히려 낮추면서 자국 기술 우선주의를 앞세우는 글로벌 표준에 역행하는 ‘무방비 상태’에 놓였다”고 말했다.
실제 유럽의 경우 시행사가 발주를 하면 입찰 초청서를 발송한 업체들만 입찰 참여가 가능한 구조인데다 자체 규격 규정인 ‘TSI(Technical Specifications for Interoperability)’라는 규제 장벽으로 비유럽 국가 진입을 사실상 원천 차단하고 있다. TSI는 유럽 내 운영되는 철도의 상호 호환성을 만족하기 위한 요건들을 규정하는데, 설계나 건설, 개량, 개조, 운영 및 유지관리, 안전 요건 등은 물론 차량에 들어가는 세부 부품 규격까지 포함돼 있어 비유럽권 업체가 규정을 따르기 까다롭다.
글로벌 철도차량 시장 점유율 1위인 중국은 철도차량 입찰 참여 시 자국법인과의 공동응찰을 의무화하고 미국은 ‘바이 아메리카 규정’을 적용해 입찰 시 재료비의 현지화 비율을 70% 이상으로 정했다. 일본도 해외 업체의 시장 진입을 원천봉쇄하고 있다.
부품 업체들은 “국내 부품사들은 회사의 성장뿐만 아니라 정부의 장기적인 철도산업육성계획에 맞춰 우리 부품이 탑재된 국산 고속차량을 해외에 수출해보겠다는 담대한 사명감을 갖고 토종 고속차량을 개발했다”며 “하지만 아무런 보호 장치도 마련되지 않은 국내 입찰 시장에서 정책적인 도움은 고사하고 가격이 높다는 이유로 외면 받는 등 ‘역차별’을 당해왔다”고 주장했다.
이어 “동력분산식 고속차량을 단 한 번도 만들어 본 적 없는 해외 업체에 사업을 맡긴다면 어렵게 이뤄낸 국산화된 고속차량 기술의 퇴화는 물론 고속차량 산업 생태계의 붕괴를 부를 것”이라며 “한국은 해외 업체들의 ‘스펙 쌓기’에 최적화된 먹거리용 시장으로 전락해 버린다”고 강조했다.
부품 업체들은 해외 업체들이 진입이 용이한 국내 시장에서 응찰 가격을 낮춰 수주를 한 뒤, 납품 실적을 쌓아 글로벌 시장 경쟁력을 갖출 가능성이 높다고 우려하고 있다.
앞서 비대위는 지난 1일 코레일과 SR에 호소문을 전달하며 국내 입찰 시장의 개선을 촉구한 바 있다.
solidkjy@fnnews.com 구자윤 기자
※ 저작권자 ⓒ 파이낸셜뉴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