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주의 패션디자이너 마틴 마르지엘라
롯데뮤지엄서 3월까지 국내 첫 개인전
설치·조각·영상 등 50여개 작품 전시
모발로 인간의 생애 표현한 실리콘 두상
몸의 접히는 부분을 조각한 토르소 등
불편함과 공존하는 미학으로 충격 선사
패션 디자이너에서 은둔의 예술가로 변신한 마틴 마르지엘라의 국내 첫 개인전이 서울 잠실 롯데뮤지엄에서 열리고 있다. 맨위부터 머리카락을 통해 인간 삶의 공허함을 표현한 '바니타스', 붉은 손톱을 형상화한 '레드 네일즈' 뉴시스
마틴 마르지엘라의 작품 '토르소 시리즈(Torso series)'가 전시돼 있다. 스태프들은 관람객이 지나갈 때마다 흰 천으로 한 조각씩 작품 전면을 덮어 감췄다가 열었다를 반복하며 작품 감상의 시간을 제한한다.뉴시스
전시관을 나서는데 흑백 영상 속 그로테스크한 여성의 웃음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풀어헤친 머리로 얼굴 전체를 덮어 표정을 알 수 없는 그녀의 슬픈 듯, 화난 듯, 깔보는 듯한 웃음소리. 전시를 보는 내내 들었던 알 수 없는 감정을 증폭시키는 마지막 미디어 아트를 통해 작가는 무슨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던 걸까.
사람의 머리카락, 손톱 등을 활용한 마틴 마르지엘라의 작품들은 시대를 앞서간 '마광수'를 떠올리게 했다. 마광수의 소설속에서 그가 집착한 '손톱'에 대한 작가만의 미학과 흡사한 느낌이라고 할까. 어쩌면 예술가의 역할은 우리에게 불편함을 직면하게 하고 질문을 품게 하는 것일지 모른다.
■명품 패션 디자이너에서 은둔의 예술가로
서울 잠실 롯데뮤지엄은 오는 3월 26일까지 마틴 마르지엘라의 국내 최초 대규모 기획 전시를 진행 중이다. 그는 세계적인 패션 브랜드 '메종 마르지엘라'의 창립자이자 디자이너로 2008년 마르지엘라의 20주년 기념 쇼를 마지막으로 돌연 패션계를 은퇴했다. 이후 은둔의 예술가로 10년 이상 창작 활동을 거친 뒤 2021년 10월 파리에서 첫번째 대규모 개인전을 열었다. 이후 중국 베이징 전시에 이어 이번에 서울 롯데뮤지엄에서 국내 관객을 만나고 있다.
롯데뮤지엄 관계자에 따르면 그는 전시를 준비하는 동안에도 대면 미팅을 생략하고 e메일 등을 통해 연락하며 '신비주의'를 고수했다. 하지만 전시 준비 및 무대 연출 등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소통하며 의사를 표현했다고 한다.
1957년 벨기에 출신인 그는 "아름다움이라는 속성은 특정한 상황에서만 분명하게 드러난다. 즉 아름다움은 그러한 상황에서만 중요한 역할을 하는 속성이 있다"고 말했다. 해체주의적 작품 성향을 보이는 마틴 마르지엘라는 전시를 보는 시간 동안 어쩌면 관객에게도 '아름다움'이라는 것의 정의 자체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 같다.
셰익스피어의 '맥베스'에서 황야의 세 마녀가 "아름다운 것은 추한 것, 추한 것은 아름다운 것"이라고 했던 것처럼 아름다움은 어떤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시대(시간)에 따라, 사람에 따라 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체와 시간, 그리고 아름다움
마틴 마르지엘라는 1980년대부터 깊게 고민해온 '예술, 물질과 신체, 성별의 관념, 시간의 영속성'을 주제로 작업한 작품들을 출품했다. 총 50여점의 설치, 조각, 영상, 퍼포먼스, 페인팅 작품을 만날 수 있다. 그중 가장 눈길을 끄는 작품은 '머리카락(털)'을 사용한 작품들이다. 전시장 초입에 관객을 만나는 '헤어 포트레이츠'는 잡지 더미가 쌓여있는 가운데 연기자가 일정한 시간을 두고 한 권씩 벽에 잡지를 거는 퍼포먼스를 보여준다. 잡지 표지에는 시대 아이콘이라 불리는 인물들이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가린 채 자신의 정체를 감춘다.
2019년작인 '바니타스'는 모발로 얼굴 전체를 덮은 실리콘 두상이 5개 일렬로 전시돼 있다. 시간 순서대로 유년부터 노년까지 인간 생애 전체를 머리카락 색상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마르지엘라는 인공 피부를 입힌 실리콘 구체에 자연 모발을 하나하나 이식해 작품을 완성했다.
마르지엘라의 아버지는 그가 어릴 적 이발소를 운영했다.
머리카락에 대한 그의 관심은 어린시절 그의 기억과 관계가 있는 것일지 모른다.
이밖에도 인체의 접히는 특정 부분을 조각 작품으로 표현한 '토르소 시리즈', 토르소 시리즈의 인체를 오일 파스텔로 드로잉한 '바디 파트 블랙 앤 화이트' 등도 눈길을 끈다. 레드 네일즈는 붉은 손톱을 거대한 조형물로 표현해 아름다움에 대한 직관적인 충격을 선사한다.
hwlee@fnnews.com 이환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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