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관웅의 도슨트 와인-(3)샤또 베이슈빌, 샤또 말라라틱 라그라비에르
프랑스 시민혁명이 바꾼 프랑스를 세계사의 물줄기서 밀어내
유럽 세력 이전에 바다의 주인이던 명나라는 왜 쇄국으로 들어갔을까
해적선 과연 무법자일까일까..배안에선 모두가 평등했던 민주적 조직
최초의 주식회사도 보험사도 범선의 항해에서 시작했다
샤또 베이슈빌 와이너리. 베이슈빌의 상징이 와이너리 한 가운데에 자리잡고 있다.
샤또 베이슈빌.
샤또 말라르틱 라그라비에르. 사진=샤또 말라르틱 라그라비에르 홈페이지.
[파이낸셜뉴스] 프랑스 보르도 와인에는 라벨에 멋진 범선이 그려진 와인들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게 프랑스 보르도 생 줄리앙 지역의 그랑크뤼 클라세 와인 '샤또 베이슈빌(Chateau Beychevelle)'과 그라브 뻬삭-레오냥 지역의 그랑크뤼 클라세 와인 '샤또 말라르틱 라그라비에르(Chateau Malartic Lagraviere)'입니다.
베이슈빌은 1600년대 초 프랑스의 유명한 해군 제독이자 공작 지위를 가진 에페르논(Epernon)이 소유했던 와이너리의 와인으로 당시 배들은 그의 영지 옆을 지날때 배의 돛을 절반 정도 내려 존경과 충성심을 표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프랑스어로 '돛을 내리다'라는 뜻의 '바수 부아(Baisse Voile)'에서 와인의 이름 베이슈빌이 왔습니다.
말라르틱 라그라비에르 라벨에도 노란색 바탕에 멋진 범선이 그려져 있습니다. 1700년대 영국 해군을 상대로 연승을 했던 마우레스 드 말라르틱 백작의 범선입니다. 말라르틱 백작은 캐나다와 모리셔스 제도의 식민 총독을 지낸 프랑스의 저명인사였습니다. 당시 식민도시였던 캐나다의 말라틱(Malartic)시는 그의 이름을 따서 지은 도시입니다.
베이슈빌과 말라르틱 라그라베이르는 제국주의 시대 프랑스의 국력을 상징하던 귀족들이 소유했던 유명 와이너리였지만 1789년 프랑스 시민혁명 이후 일반인에게 소유권이 넘어간 비운의 와이너리이기도 합니다. 사실 프랑스 시민혁명은 프랑스 뿐만 아니라 세계사를 완전히 바꿔놓았습니다.
트라팔가 해전. 사진=위키피디아.
프랑스 시민혁명군이 파리를 장악한 모습. 사진=위키피디아.
■프랑스 시민혁명, 근대 세계사를 바꾸다
근대 이후 바다의 주인을 떠올리면 누구나 영국의 '로열 네이비(Royal Navy)'를 먼저 꼽습니다. 하지만 프랑스 시민혁명 이전에는 프랑스 해군이 영국 해군 못지 않게 강했습니다. 프랑스 해군은 1690년 영국 앞바다 비치헤드(Beachy Head)에서 영국 해군에게 궤멸적인 패배를 안겼으며, 1700년대 후반에는 미국 독립전쟁을 도와 체서피크(Chesapeake) 해전에서 영국 해군을 대파합니다. 영국은 이 패전으로 미국을 놓아주게 됩니다.
그러나 프랑스 해군은 나폴레옹 황제 시대인 1805년 트라팔가(Trafalgar) 해전에서 영국의 명장 넬슨이 이끄는 영국 해군에게 전멸을 당하게 됩니다. 거의 '학살을 당했다'는 말이 더 어울릴 정도의 뼈저린 패전이었습니다. 이 단 한번의 패전으로 유럽을 공포에 몰아넣었던 나폴레옹 시대가 기울기 시작합니다.
영국 해군을 쉽게 물리쳤던 프랑스 해군에게 불과 십여 년 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1789년 프랑스는 시민혁명이 일어나 왕정이 무너지고 시민정부가 들어섭니다. 이들 혁명세력은 귀족을 악마처럼 여겨 닥치는대로 단두대에 올렸습니다. 어느 나라나 왕정시대 군대를 이끄는 사령관과 장교들은 귀족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모조리 처형당하거나 지위를 잃게 되자 프랑스 해군의 전투력이 급락했던 것이었습니다. 트라팔가 해전은 프랑스 해군과 영국 해군이 맞붙은 게 아니라 프랑스 해군이 전투를 피해 요리조리 도망다니다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그냥 학살당한 전투였습니다.
프랑스 해군이 트라팔가 해전에서 전멸당한 모습을 그린 그림. 사진=위키피디아.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대양으로 나오며 시작된 '대항해 시대'에 바다를 지배한다는 것은 바로 '세계의 주인'을 의미했습니다. 1492년 스페인이 아메리카 대륙을 식민지로 삼고 바다를 지배했던 시기에는 '아르마다(Armada)'가 있었습니다. 펠리페 2세가 편성한 무적의 해군 아르마다는 이름만으로도 공포 그 자체였습니다. 그러나 1588년 자만에 넘친 모습으로 영국을 침범한 아르마다는 영국의 화공과 갑작스런 태풍에 생각지도 못한 참패를 당하고 주요 식민지이던 네덜란드마저 독립을 허용하게 되면서 서서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됩니다.
스페인이 사라진 이후 1600년대 초 대양 해권을 쥔 나라는 네덜란드였습니다. 인도양과 대서양을 오가는 향신료 무역과 해양 물류를 휩쓸며 바다를 경제적으로 장악했습니다. 그러나 영국은 강력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항해조례'를 만들어 네덜란드에 전쟁을 걸고 결국 1600년대 후반 네덜란드의 모든 것을 빼앗아 버립니다. 네덜란드가 운영하던 북아메리카 대륙 등 모든 식민지와 대양의 헤게모니를 차지한 영국은 이 때부터 제국주의 틀을 갖추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유럽대륙에는 프랑스가 있었습니다. 태양왕 루이 14세가 강력한 영국의 경쟁자로 등장해 제국주의 패권을 놓고 1688년부터 100년 넘게 전쟁을 벌이지만 프랑스는 갑작스런 시민 쿠데타가 발생하면서 주저앉고 맙니다. '해가 지지 않는 나라' 대영제국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죠.
명나라 정화함대가 인도양을 탐험한 경로. 사진=위키피디아.
■유럽 이전엔 명나라가 바다의 주인이었다
그러나 유럽이 대항해시대를 열며 바다를 지배한 것 같지만 앞서 바다를 호령한 '바다의 왕자'는 명나라 였습니다. 명나라는 3대 황제 영락제가 1405년부터 1433년까지 28년 동안 '정화 함대'를 띄워 인도양과 남아프리카 지역까지 샅샅이 훑고 다닙니다. 8000톤급 초대형 선박 60여 척과 소선 100여 척을 거느린 실로 어마어마한 규모였습니다. 함대의 중심이 되는 기함은 '서양보선', '서양취보선' 등으로 불렸는데 그 크기가 길이 150m, 넓이 60m에 달했습니다. 1492년 콜롬부스가 아메리카 대륙에 상륙할 당시 탔던 배의 길이가 30m 정도였고, 1800년대 세계 최강이던 영국 해군의 배가 2000톤급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지금도 상상하기 힘들 정도의 큰 배였습니다.
지금으로 따지면 항공모함 수십 척과 구축함 등이 인도양 앞바다를 휩쓸고 다니는 모습을 보는 충격일겁니다. 가히 명나라 제국은 진정한 바다의 주인이었습니다. 당시 인도양은 세상의 모든 부와 물산과 기술이 집약돼 있던 중국과 인도가 있는 말 그대로 '세상의 중심'이었습니다. 유럽이 1400년대 말 대양으로 나온 것도 바로 명나라가 지배하는 인도양으로 향하는 뱃길을 찾아 나선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인도양을 호령하던 압도적인 제국 명나라는 돌연 1433년 이런 헤게모니를 다 버리고 내륙으로 들어가 다시는 바다로 나오지 않습니다. 이 때를 기점으로 헤게모니가 서양으로 넘어가며 세계사의 흐름이 바뀌게 됩니다. 대양을 나와 아시아에 도착한 유럽 세력들은 주인없는 인도양 바다를 서서히 유린하며 제국주의의 꽃을 피웁니다.
프랜시스 드레이크가 스페인 누에스트라 세뇨라 델 로사리오에서 선장으로부터 항복을 받아내는 모습을 그린 그림. 사진=위키피디아.
■바다의 무법자 해적선, 그 안에는 민주주의 꽃이..
근대 바다를 얘기할 때 절대 빼놓을 수 없는 게 또 있습니다. 해적입니다. 바다에서 다른 선박을 공격해 재물을 탈취하는 무법자들이지만 해적은 1800년 이전까지만 해도 나라가 돈 받고 면허를 내주며 관리하던 합법적인 군사조직이었습니다. 해양 경쟁이 시작되던 당시 어느 나라도 영토는 통제했지만 영해까지는 국가 권력이 닿을 수 없었습니다. 민간조직인 해적이 다른 나라 선박을 공격해 약탈을 해오니 정부는 수익금의 일부를 챙길 수 있는데다 상대국의 군사적, 경제적 힘을 약화시킬 수 있어 좋았습니다. 해적들도 사익을 추구하면서 국가 발전에 기여한다는 명분이 있어 모두가 만족하는 사업이었습니다. 즉, 국가가 직접 권력을 휘두르면 해군이 되고, 사적인 집단이 폭력을 휘두르면 해적이었던 것입니다.
앞서 1588년 당시 스페인 아르마다를 패퇴시킨 영국 해군 지휘관이 그 유명한 해적 프랜시스 드레이크(Francis Drake)였습니다. 드레이크는 당시 세계 최강의 해상국가이던 에스파냐 선박과 항구를 공격해 이름을 날린 해적입니다. 1579년에는 아메리카에서 금은보화를 싣고 오던 에스파냐 상선을 약탈하고 선장에게 약탈명세서까지 써줬을 정도로 대담한 인물입니다. 당시 영국은 백년전쟁에서 패한 후 변방의 작은 섬나라로 살던 시기입니다. 훗날 영국 엘리자베스 1세는 드레이크에게 기사 작위를 내리고 스페인이 영국을 쳐들어오자 그를 해군 사령관으로 임명해 스페인 아르마다 함대를 막아냅니다. 영국을 '신사의 나라'가 아니라 '해적의 나라'라 비아냥 대는 말이 여기서 나온듯 합니다.
해적들은 바다에서는 정말 무서운 무법자였지만 그 내부에서는 어느 집단보다 민주주의를 중시하고 잘 지키는 조직이었습니다. 배 안에서 어떤 현안이 발생하면 늘 모든 승무원이 표결을 통해 처리했습니다. 또 약탈을 통해 재물이 생기면 n분의 1로 나눴습니다. 다만 선장과 조타수만 2배로 가져갔습니다. 또 전투 중 부상을 당하면 절대 버리지 않고 끝까지 치료를 해주고 배당도 똑같이 했습니다. 만약 죽게되면 그 부인에게 배당을 했습니다. 일반 배의 선원들은 해적선에 약탈을 당하게 되면 너도나도 해적이 되기를 원했다고 합니다. 해적선은 인원이 많아 노동 강도가 훨씬 덜했고 민주주의와 평등주의가 지켜지는 곳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17세기 상업용으로 사용되던 카라크 선의 실제 모습. 사진=위키피디아.
16세기 범선의 모습을 그린 그림. 사진=위키피디아.
■주식회사, 보험의 시작도 배였다
대항해 시대 길이 30m의 작은 배에 의지해 대서양과 태평양을 누빈다는 것은 실로 어마어마한 모험이었습니다. 대양의 거친 파도에 맞서 막막한 두려움을 안고 거친 바다로 전진한다는 것은 공포 그 자체였을 겁니다. 그러나 더 무서운 것은 배 안에 있었습니다. 선원들은 테니스 코트 크기보다도 작은 좁은 공간에 수 개월 동안 갇혀있다 보니 괴혈병과 사투를 벌였습니다. 괴혈병은 신선한 음식을 먹지 못해 비타민C가 부족하면 생기는 병입니다. 배가 출발할 때는 깨끗한 식수와 여러 식자재를 가지고 나가지만 불과 몇 주가 지나면 모두 동나고 선원들은 그 이후엔 염장고기, 말린 생선을 먹었습니다. 신선한 야채를 먹지 못하니 대개 4주 정도가 지나면 입천장이 헐고 붓기 시작해 피가 나고 이가 빠지기 시작합니다. 이후 혈변을 보며 고열과 심한 갈증에 시달리다 갑자기 죽게 됩니다. 나중에 영국의 제임스 쿡(James Cook) 선장이 소금에 절인 양배추를 실어 선원에게 주기적으로 먹이면서 괴혈병의 공포에서 벗어났지만 그 이전까지 선원들에게 괴혈병은 수시로 마주하는 폭풍우와 거센 파도보다도 무서웠습니다.
먼 바다로 나가는 선원들이 온갖 위험에 시달렸지만 이를 뒤에서 후원하는 투자자들도 매우 큰 위험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유럽에서 출발한 배는 대서양으로 나와 아프리카 희망봉을 돌아 아시아가 있는 인도양으로 들어가야 했습니다. 너무도 길고 위험한 항로여서 배가 한 번 출항해 돌아오려면 적어도 2년 이상이 걸렸습니다. 물론 항해를 마치고 돌아오면 수익률이 적어도 400%가 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대서양으로 떠난 배 중 절반은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큰 돈을 들여 무역 선단을 꾸려 바다로 보냈는데 풍랑을 만나 배가 좌초되거나, 돌아오는 길에 해적에 약탈을 당하게 되면 투자자 입장에서는 고스란히 투자금을 다 날리게 되는 일 이었습니다. 이런 위험을 분산시키기 위해 등장한 것이 주식회사입니다. 출항에 앞서 투자자를 모집하고 예치금 증서를 나눠준 후 나중에 배당을 하는 방식을 도입하게 됩니다. 이게 최초의 주식회사 동인도 회사입니다. 이어 해상무역의 손실 위험을 다수에게 분산시키는 보험이 등장합니다. 이렇듯 거친 대양을 떠 다니던 범선 속에는 대항해 시대 패권 전쟁과 온갖 경제사가 다 담겨 있습니다.
■와인에서도 대항해 시대의 강단이 느껴져
와인셀러에서 크리스토퍼 콜롬부스(Christopher Columbus),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와 함께 대항해 시대를 이끌었던 주인공의 얼굴이 새겨진 라벨의 와인을 꺼내듭니다. 이탈리아 토스카나 와인 카스텔로 디 베라짜노 끼안티 클라시코(Castello di Verrazzano Chianti Classico)'입니다. 갑옷을 입고 있는 근엄한 얼굴의 주인공은 이탈리아 베라짜노 성의 주인이자 위대한 탐험가인 '지오반니 다 베라짜노(Giovanni da Verrazzano)'로 지금의 뉴욕과 북미대륙 동해안을 발견한 사람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낮선 이름이지만 미국 뉴욕에서는 평가가 완전히 다릅니다. 1964년 뉴욕 브루클린과 스테이튼 섬을 연결하는 세계에서 가장 긴 현수교가 만들어졌는데 시민들은 그의 업적을 기려 '베라짜노 대교'로 이름 지을 정도로 베라짜노에 대해 각별히 생각합니다. 매년 개최되는 뉴욕마라톤이 여기서 출발합니다.
산지오베제(Sangiovese) 95%, 까나이올로(Canaiolo) 5%를 섞어 만드는 베라짜노는 잔에 따라보면 산지오베제 와인의 전형적인 루비빛을 띠며, 감칠맛 나는 붉은 계열의 과실향이 아주 좋습니다.
입에 넣어보면 산미가 아주 좋으며 타닌이 적절하게 무게를 잡아줍니다. 까베르네 소비뇽(Cabernet sauvignon), 메를로(Merlot) 등 국제품종을 블렌딩하는 보들보들한 와인과는 확실히 결이 다릅니다. 와인을 열자마자 입안에 조금 머금어도, 오랜 시간 디캔팅을 거쳐 마셔도 누그러지지 않는 독특한 심지가 분명히 있습니다. 구부러지지만 무너지지 않는 등산모자 속 얇은 철사같은 그런 강단이랄까요.
혹시 주변에 새로운 도전에 맞서 새 출발을 하는 지인이 있나요. 대항해 시대의 숨결이 담긴 와인을 선물해 응원하면 어떨지요.
kwkim@fnnews.com 김관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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