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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움을 녹이는 위로는 없다… 지금 주어진 일에 진심을 다할 뿐 [신달자 에세이]

<고통이여 나의 친구여!>
외로움은 은빛 날이다

외로움을 녹이는 위로는 없다… 지금 주어진 일에 진심을 다할 뿐 [신달자 에세이]
일러스트=정기현 기자
우리 동네에는 300년이 넘은 보호수가 있다. 산책길에 몇 마디 인사를 건네는 일은 일상이다. 그는 늘 80살의 내게 "아가야!"라고 부른다. 나는 선생이라 부른다. 호칭은 선생이지만 이미 몸은 상할 대로 상해 껍질은 투박하여 쪼개지고, 속은 시멘트로 채워져 있다. 그런 몸으로 봄이면 시퍼런 잎들과 그늘을 만들어 낸다. 그의 호칭은 다시 '투지'가 되고, 나는 스스로 격상되어 투지의 제자가 된다. 그러나 내가 날 부르는 정직한 호칭은 보통 여자다.

우리 동네 300년 넘은 보호수
찾아갈 때마다 투정하는 나에게
"그래 그것뿐이야? 그럼 됐어"
바람 불어 내 어깨를 토닥여준다

이 투지의 스승에게 나는 많은 말을 한다. 요즘 잘 안 풀리는 이야기, 그나마 이 정도는 행운이라는 이야기, 속이 터질 듯하다가 겨우 넘겼다는 이야기와 무능에 대해서, 과한 욕망에 대하여. 때론 어떤 친구 욕도 하고, 어떤 남자 흉도 보면 그 스승은 대답한다.

"그래 겨우 그것뿐이야? 터지다가 견디었으면 너는 잘살고 있는 거야. 수백 번 터진 사람도 많아. 아가야, 너는 지금 산책 중이잖아. 그럼 됐어. 됐다니까."
"나는 힘든데 왜 내 마음은 몰라주세요." 하면 그는 바람을 불러 내 어깨를 토닥거려 준다.

심심하다고 했고 고독하다고 말하였으나 외로움이란 말은 발음하지 않았다. 움직이면 외로움의 은빛 날에 내 몸이 베인다. 그 무게는 없는 듯 안으로 감당하며 살아간다. 외로움은 생명의 그늘인가. 누구도 제외되는 법이 없는가.

외로움은 가는 비처럼 오기도 하고, 구름처럼 누르기도 하고, 때론 천둥처럼 소름이 돋게도 한다. 외로움은 온 몸을 조여 통증까지 느끼게 할 때도 있다. 스스로 그 날에 베이지 않으려고 꼭 하지 않아도 되는 말을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한다. 아니면 혼자 노래를 부르기도 한다.

영국인 사진작가 마이클 케나의 흑백사진은 거의 모두 홀로 선 나무들이다. 눈밭, 벌판, 절벽에 홀로 서서 자연의 골수 깊은 고통을 견디며 지극히 차가운 아름다움을 연출해 낸다. 외로움이 아름다움으로, 빛으로, 예술의 극치로 변화하는 것은 나무 내면의 고통이 승화된 결과일 것이다.

그 나무들이 정겹다. 거부하지 않고 온전히 받아들이며 묵언수행과 간절한 기도로 오직 자신의 길을 가는 나무와 겨누면 인간의 외로움이란 간지럼 수준에도 도달하지 못할지 모른다. 이 시대의 외로움은 반드시 홀로에서 오는 것만은 아니다. 배는 부른데 마음은 굶주리는 정신적 허기가 핵심이다. 소망이 빗나가고 관계는 무너지고 자신은 시선 밖에 머문다고 생각될 때 우울은 깊어지고, 외로움은 질병 수준으로 추락한다. 문제는 그런 문제가 없는 사람에게도 허기는 있다.

인간 삶이란 미끄럼틀이 아니다. 잘 흘려 내리는 것이 아니더라. 걸림돌에 자주 넘어진다. 삶은 엘리베이터가 없다. 아픈 두 다리로 아득한 층계를 스스로 오르지 않으면 도달하지 못한다. 우리는 다 다리가 아프다. 여자만이 아니다. 우리나라에선 남자들은 울어선 안 된다고 가르쳤다. "사나이의 눈물은 패배"라고 우겼던 것이다. 그렇게 견디다가 결혼을 하고 울적할 때 그 외로움을 아내에게 위로받을 수 있을까. 가장(家長)으로 더욱 울어서는 안 되는 입장으로 위치 격상되어 있는 남자들은 사실 늘 마음이 허기져 있다. 평범한 여성에게도, 뛰어난 유대감과 사회성을 가져 '독종'이라 불리는 여자에게도 과다한 외로움이 존재한다. 이 외로움의 걸림돌을 디딤돌로 만들지 않으면 우리는 캄캄한 어둠을 피할 수가 없다. 사람 내부에 외로움이 하나의 장기처럼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외로움은 하루에 담배 15개를 피우는 것과 같다고 한다.

세계는 이 외로움을 철거하려는 정치적 여론까지 확산되고 있다. 2018년 영국은 최초로 외로움담당장관을 뽑았다. 트레이시 크라우치다. 2021년 일본도 고독장관을 임명했다. 개인의 외로움 문제를 정부 차원에서 돕겠다는 의지일 것이다. 그러나 개인의 외로움을 질병 차원을 뛰어넘어 새로운 의욕으로 끌어올리는 일은 작은 지원이 아니라 대화일 것이다. 소통 그리고 자존감이다.

할 수 없는 일로 고민하지 말고
이 순간 할 수 있는 일을 할 때
외로움이라는 심장은 다스려진다
결국 내가 나를 대접하는 게 '삶'

가장 어두운 순간에도 아름다운 걸 포착하는 능력, 그래서 상처를 새로운 의미로 부여하며 자신을 추스를 수 있는 힘. '나는 잘못되고 있다는 고독의 경고음'을 물리칠 수 있는 것은 사람과 관계에 있다고 생각된다.

자신의 둘레를 정확하게 이해해서 조금도 과다하지 않게 자신을 만들어 가는 일이다. 외로움을 인정하는 일이다. 외로움을 녹이는 위로는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외로움의 땅이 넓어지면 투시의 눈이 멀고 감각의 촉매가 둔해진다. 외로움이 작아지고 힘을 얻으며 의욕이 팽창하게 하는 것은 결국 자신이다. 자기가 자신을 대접하는 일이 소득이게 하는 …. 할 수 없는 일을 고민하지 말고 할 수 있는 일을 조금씩 하게 되면 할 수 없는 일도 하게 되지 않을까. 내가 무엇이라도 일을 할 때 운명의 지배를 덜 받는다는 생각을 나는 너무나 오래 해왔었다.

외로움은 이상현상이 아니다. 부끄러운 것도 아니다. 자연현상과 같이 꽃이 피었다 지고 다시 피는 것이 아닐까. 외로움은 생명을 가진 자들의 육신 그 한 부분이다. 하나의 장기라고 말해 두자. 그러므로 잘 사귀는 일이 중요하다. 그런 노력이 정서적 근육을 다지는 일이 되지 않을까.

외로움을 생명의 그늘이라고 수용한 것처럼 외로움은 살아있음의 신호다. 그러므로 한 몸으로의 소통이 필요하다. 나는 나에게 이런 교과서적인 말을 되풀이한다. 빗나가는 나를 세우기 위해서다.
취약한 힘을 기르기 위해서다. 우리 동네 '투지 선생'도 이 문제에 대해선 만족한 대답을 하지 못하는 것 같다. 땅에 뿌리를, 하늘에 머리를 둔 300년을 넘어 산 보호수도 외로움은 잘 풀지 못하는 문제일까.

외롭다고 말하려면 금기처럼 뒷말이 흐려진다. 이 시대의 변화에 몸을 실어 인생이라는, 삶이라는 여행을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 '외로움'은 바로 나 자신의 심장이 될 수도 있는 것이라고 하면 안 될까. 당신은 심장을 어떻게 다스리나요? 지금 이 시간에 주어진 일을, 쓰거나 읽거나 먼 산을 바라보거나 아무튼 무슨 일이건 진심으로 하는 것. 말이 될까요?

외로움을 녹이는 위로는 없다… 지금 주어진 일에 진심을 다할 뿐 [신달자 에세이]
신달자 시인


jins@fnnews.com 최진숙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