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뉴스]
[수담활론(手談闊論)]은 각 분야의 전문가들의 글(수담)을 통해 우리사회 곳곳의 이슈들을 파악하고 보다 쉽게 이해하기 위해 마련됐습니다. <편집자 주>
'의대 쏠림' 현상이 주목을 받고 있다. 대졸자, 공기업 합격생이 의대에 재도전하고 '인문-사회-자연-이공계'에 입학한 신입생이 전공을 버리고 의대에 재도전하고, 눈치 빠른 학부모들은 떡잎부터 알아본 초등학생 자녀들을 의대 준비 학원에 보낸다. 청운의 꿈을 품고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의대에 진학하는 젊은이들도 늘고 있다.
의대에 들어가 의예과 2년, 본과 4년을 마치면 일반의가 되고 1년의 인턴, 4년의 레지던트 과정을 더 거치면 전공의가 된다.
물론 이들이 바로 우리의 건강을 책임지는 첨병이다. 따라서 더 똑똑한 학생들이 더 오랜 기간 동안 의사의 꿈을 가진 채 일반의, 전공의가 되면 우리 역시 더 질 좋은 의료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 따라서 의대 광풍을 과다하게 걱정할 필요도 없다. 또한 과하면 넘치는 법, 대한민국의 수재들로 대한민국 의료계가 포화되어 넘치면 수재들이 관련 분야로 이직하는 스필 오버(spill-over) 효과로 타산업도 발전하기 때문이다.
국내 의과대학 제도의 비효율성
단 우리가 우려해야 할 점은 바로 국내의 일반의, 전공의 양성 과정의 비효율성이다.
우선 의대 진학을 결정하는 시기가 너무 이르다. 의대 지망생들은 의사가 무엇인지, 의대에서 수강할 과목이 무엇인지 모른 채 의대에 진학한다. 그 결과 의대 진학 후 이를 후회하거나 타과 입학 후 의대에 진학하지 않았음을 후회할 수도 있다.
어쩌면 수험생과 학부모는 '낭만닥터 김사부', '닥터 차정숙'을 롤모델로 삼았을 지 모른다. 물론 김사부와 차정숙의 인생은 실제 의사의 인생이 아니고 현실의 김사부, 닥터 차는 다른 의료진과 잡담을 하거나 연애할 시간도 없는 사람들이다.
여기에 우수한 내신, 수능 성적에 힘입어 의대에 진학한 의예과 학생의 2년은 철저히 낭비되는 기간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딱 2년만 낙제를 면하면 본과에 진학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대한민국 의료진은 (거의) 동일한 지식으로 무장된 전문가 집단이다. 즉 국내 의료진은 초등·중·고등학교 12년, 의예과 2년, 본과 4년간 동일한 교과서로 동일한 지식을 습득한 집단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국내 의료진은 진단하고, 약 처방하고, 간혹 수술도 하는 임상의사이다.
인턴-레지던트 과정을 거친 전공의는 상이한 지식과 경험을 습득할 수 있다. 하지만 특정 분야의 전공의 역시 12+6+5년, 총 23년간 동일한 교과서로 동일한 지식을 습득한다. 따라서 임상과 연구를 병행하는 전공의 역시 의학 전공자에 불과하다.
그 결과 국내 의대에는 전국의 수재들만 모이지만 세계 의료 산업에서 대한민국이 차지하는 비율은 2%에 불과하고, 이 2% 중 국내 의료진의 기여도는 0%라고도 한다. 또 국내 일반의, 전공의들이 모두 임상 위주 교육만 받은 결과 국내 의료산업을 이끌 의사 과학자는 거의 없다고도 한다.
따라서 작금의 의대 쏠림 현상을 국가와 개인 모두에게 유리하도록 활용할 방법을 도출할 필요가 있고 이를 위하여 필자는 현행의 '병렬형 의예과-본과 제'"를 폐기하고 로스쿨 방식의 '직렬형 의학전문대학원 제도'를 도입하도록 건의한다.
학문들이 자발적으로 융합되고 경쟁력을 극대화하는 '직렬형 의전원' 제도
필자가 미국 듀크 대학교에서 의공학 박사를 취득할 당시, 필자는 듀크 대학 병원의 심장외과 전공의들과 공동 연구를 하며 생화학에 박식한 의사, 심장 순환기 역학을 전기 회로도를 그리며 해석하는 의사 등과 공동 연구를 수행하였다.
이들이 이종 학문에 박식한 이유는 간단하다. 미국 의대에 진학하려면 이공계 대학 졸업이 필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국 의사의 뇌에는 생화학과 의학, 전기공학과 의학, 인공지능(AI)과 의학이 융합돼 있다. 따라서 이들이 의대에서 동일한 과목을 수강해도 상이한 학부 전공을 거친 이들의 뇌는 이종 학문을 자발적으로 융합하고 상이한 융합 지식을 창조할 수 있다.한국과 같이 미국에서도 의대 진학 경쟁은 치열하다. 그래서 의대 진학을 희망하는 대학생들은 학점 관리에 철저하다. 또 의대 진학 시 반드시 응시해야 하는 의과대학 입학 자격고사(MCAT)에서 높은 점수를 얻으려고 자기 전공을 열심히 공부한다. 따라서 미국 의대생들은 모두 학부 4년을 알차게 지낸 학생들이다.
또한 일부 의대 지망생은 학부에서 자연과학이나 공학을 전공한 후 의대 진학 대신 공학, 자연과학 석박사학위를 취득하기도 한다. 반대로 입학 당시 의대에는 관심도 없던 학생이 대학 생활 중 의대 진학을 결심하기도 한다. 즉 미국 대학생들은 철든 후, 더 합리적으로 의대 진학을 결정할 수 있다.
성공한 '직렬형' 로스쿨 제도와 실패한 '병렬형' 의전원
국내 로스쿨(법학전문대학원)은 2009년 25개 대학교에서 개원하였다. 로스쿨을 개원한 대학교는 기존 법학과를 폐지했고 국가도 기존의 사법고시를 점진적으로 폐지했다. 그 결과 현재 대한민국에서 변호사가 되려면 대학과 로스쿨을 졸업한 후 변호사 시험을 통과해야 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현행 국내 로스쿨 제도는 직렬형 제도라 할 수 있다.
그 결과 MZ 세대 변호사들은 과거와 같이 6법전서를 10번 이상 통달한 수재들이 아니라 학부에서 인문학, 사회학, 자연과학, 공학, 예술 등을 전공한 후 로스쿨에 진학한, 다양한 전공 지식을 가진 수재들이다. 이들은 국민에게 더 창의적인, 이종 학문이 융합된 법률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2006년 도입된 국내 의학전문대학원(의전원) 제도는 대졸자들이 의예과를 거치지 않고 직접 본과로 진학하도록 하는 제도이다.
단 국내 의과대학은 기존 의예과-본과 트랙과 병행해 의전원 트랙을 도입하는 패착을 저질렀다. 따라서 고교 졸업생 중 1류는 졸업 즉시 의대에 진학하는 반면, 1.5류는 이로부터 4년이 지난 대학 졸업 후에야 의전원을 통해 의대에 진학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의전원 트랙 도입 결과에 실망한 의과대학들은 점차적으로 의전원 정원을 축소했고 그 결과 현재 국내 의대는 과거의 의대로 회귀했다.
만일 국내 의과대학이 예과-본과 트랙과 의전원 트랙을 병렬형으로 운영하는 대신 의예과를 폐지하고 대학 졸업생만 의대에 입학시키는 의전원 트랙만 운영하였다면 어땠을까. 화학, 생물학, 물리학 전공자가 의사가 되고 전자공학, 화학공학, 로봇 공학, 컴퓨터 공학, 인공지능 전공자가 의사가 되었을 것이다.
이들 중 일부는 의대 졸업 후, 전공의가 된 후, 의학 관련 스타트업을 창업하거나 국내 대기업에 취업해 의학과 관련된 신사업 부서장으로 근무할 수도 있다.
의대나 병원에 남아 임상을 담당하는 의사들 역시 자신들의 뇌에 축적된 융합의 산물을 이용해 의사 과학자 또는 의사 공학자가 돼 저절로 국내 의료 산업을 선도했을 것이다. 이들은 이미 의학용 '챗 GPT'를 만들어 사용하고 있을 지 모른다.
유대인보다 더 총명하다는 단군의 후손들의 의대 광풍은 직렬형 의전원 제도 하에서도 지속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이 광풍을 억제하려 하는 대신 선순환적으로 이용할 수만 있다면 국내 의료 산업은 전 세계를 주도할 가능성이 매우 높을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전국의 수재들이 대학에서 다양한 전공 지식을 습득한 후 직렬형 의전원에서 헤쳐 모여 융합과 혁신을 달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직렬형 의학전문대학원과 대한민국 의료 산업의 미래
작금의 세계 의료 시장 규모는 1조5000억달러로, 이 중 1조달러가 제약 시장, 5000억달러가 의료 장비 시장이라고 한다.
직렬형 의전원이 배출한 의사들 중 얼추 반은 자연과학 전공자, 나머지 반은 공학 전공자인 대한민국을 상상해보자.
과연 이들이 1조5000억달러 글로벌 시장을 가만히 놔둘까. 대한민국 의료계의 삼성과 SK, LG, 현대, 한화는 지금 어떤 모습일까. 그 곳에서는 어떤 융합인들이 활약하고 있을까. 이들은 이 가운데 얼마를 거둬들였으며 시장을 얼마나 팽창시켰을까.
상상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린다.
하지만 상상만으로는 부족하다. 뜻 있는 이들이 그 선봉에 나서 비효율적인 병렬형 의전원 제도를 철폐하고 더 효율적이고 융합적인 직렬형 의전원 제도를 추진할 때가 바로 지금이다.
ᅠ/심영택 서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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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091@fnnews.com 김영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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