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의 대중규제 압박 거부할수도,
핵심 생산거점 中 외면할수도 없어
삼성전자·SK하이닉스 '딜레마'
전략적 '모호함' 당분간 유지
장기적으론 中 대체지 찾아야
미국이 중국의 첨단산업 견제를 위해 우방국에 규제 동참 압박을 높이면서 국내 반도체업계의 셈법이 복잡해지고 있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안은 삼성전자·SK하이닉스의 중장기 경영계획은 시계제로 상태에 놓인 지 오래다. 세계 최대 반도체 시장인 미국과 중국 중 어느 한 쪽을 포기하기 어려운 만큼 두 나라 사이에 낀 국내 반도체 업계의 고심은 갈수록 깊어지는 모양새다. 전문가들은 중국의 첨단산업 굴기를 막기 위한 미국의 규제조치가 지속될 것으로 예상되는 만큼 중장기적으로 생산거점 다변화를 통한 '탈중국'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고 있다. 다만 중국 공장에 쏟아부은 막대한 투자 규모와 반도체 시장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높은 비중을 감안할 때 당분간 전략적 모호함을 유지하며 중국 사업 불확실성을 낮춰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미 대중규제 압박… 삼성·SK 곤혹
21일 관련 업계에 따르면 미국 정부는 대중국 첨단산업 규제를 강화하며 반도체 선두기업인 삼성전자·SK하이닉스에도 사실상 동참을 압박하고 있다.
최근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는 윤 대통령의 국빈방문 논의 과정에서 우리 정부 측에 '마이크론 제품의 대중 판매가 금지될 경우 한국 기업들이 부족 물량을 공급하지 않도록 해달라'고 요청했다. 미국 의회도 정부와 보폭을 맞추며 대중규제 대응에 총력전을 벌이고 있다. 미국 하원의 마이클 매콜 외교위원장과 마이크 갤러거 미·중 전략경쟁특별위원회 위원장은 한국 기업들이 마이크론의 중국시장 점유율을 가져가도록 허용할 경우 긴밀한 한미동맹이 약해질 수 있다는 내용이 담긴 서한을 지나 러몬도 미국 상무부 장관에게 보냈다.
미국의 대중규제에 중국이 강력 대응을 천명하자 양국 사이에 낀 국내 반도체 업계는 곤혹스러운 기색이 역력하다. 중국 현지에 핵심 생산거점을 다수 두고 있는 삼성전자·SK하이닉스가 메모리반도체 업계에서 차지하는 독과점적 지위를 감안할 때 미국 정부의 압박 수위가 예상보다 거세지고 있어서다. 대중견제 동참을 요구하는 미국의 거센 압박을 무작정 거부할 수도 없고, 핵심 반도체 매출처이자 핵심 생산거점인 중국을 외면하기도 현실적으로 어렵다.
삼성전자·SK하이닉스는 오랜 기간에 걸쳐 중국에 대규모 투자를 통해 반도체 핵심거점을 구축한 상태다. 삼성전자 시안1·2공장은 12인치 웨이퍼 기준 월 25만장의 생산능력을 갖추고 있다. 삼성전자 낸드플래시 생산물량의 40%를 담당한다. SK하이닉스도 우시 1·2라인에서 생산한 D램 제품이 회사 전체 물량의 48%를 차지한다.
■삼성·SK, 中 매출 급감·투자 축소
미국 정부가 한국 기업들의 중국 내 첨단 반도체 장비 수출 유예조치를 지렛대로 삼고 있어 미국 측의 요구를 거부할 시 해당 조치가 종료될 가능성이 높다. 미국 상무부는 지난해 10월부터 18나노미터(1㎚=10억분의 1m) 이하 D램, 128단 이상 낸드플래시, 14나노 이하 로직반도체 생산장비의 중국 수출을 금지하고 있는데 삼성전자·SK하이닉스는 한시 유예조치를 적용받고 있다. 향후 중국 공장 첨단설비 반입이나 업그레이드가 어려울 경우 미세공정 수요 증가 및 공정개선 요구에 대응하기 어려워 실적 타격뿐 아니라 사업 경쟁력 하락이 불가피하다.
삼성전자·SK하이닉스는 첨예한 미·중 갈등 속에 중국사업 불확실성을 줄이기 위해 현지 투자를 줄이는 추세다. 국내 반도체 업계의 중국 내 매출은 지난해를 기점으로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 삼성전자의 올해 1·4분기 중국 지역 매출은 7조9153억원으로, 전년 동기(14조8607억원) 대비 46.7% 감소했다. 1·4분기 중국 매출이 역성장한 것은 지난 2019년 이후 4년여 만이다. 특히 삼성전자 전체 매출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10년 내 최저치를 기록했다. 올 1·4분기 삼성전자 중국 매출 비중은 지난해 같은 기간 26.2%보다 7.4%p 떨어진 18.8%에 그쳤다. SK하이닉스 역시 올해 1·4분기 연결 기준 중국 현지법인 합산 매출이 1조5461억원으로, 전년 동기(3조8185억원)와 비교해 59.5% 급감했다. 회사 전체 매출에서 중국 비중도 이 기간 31.4%에서 30.4%로 하락했다.
■"장기적으로 중국 의존도 낮춰야"
전문가들은 중장기적으로 생산거점 다변화 등을 통해 중국 의존도를 낮추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면서도 세계 최대 반도체 수요처인 중국 시장을 외면할 수 없는 현실적 어려움을 감안해 전략적으로 모호한 스탠스를 유지할 필요가 있다고 당부했다. 특히 개별 기업이 국제정세에 적극 관여하기 어려운 만큼 우리 정부가 기업 입장을 대변해 미·중과 소통에 나서야 한다는 지적이다.
홍기용 인천대 경영학부 교수는 "미국은 기본적으로 미·중 간 관계에서 절대적 우위를 점하기 전까진 중국에 대한 제재를 이어나갈 것으로 보인다"며 "미·중 갈등으로 인한 리스크를 줄이기 위해 반도체 생산기지를 제3국 등 외국에 분산시키려는 움직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홍 교수는 "미국과 협력을 최우선시하되 공급망의 다각화를 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며 중국과의 관계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
바이든 정부가 미·중 갈등 심화시 결국 미국에도 좋지 않다는 것을 인지한 상태로 보여 양국 관계에 변화가 생길 가능성도 염두에 둬야 한다"고 부연했다.
이종환 상명대 시스템반도체공학과 교수는 "장기적으로 중국 의존도는 낮추는 게 맞지만, 지금까지 국내 기업들이 중국에 투자한 규모를 볼 때 철수는 말이 안 된다"며 "향후 4~5년은 중국 시장 의존도가 높을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기업들은 모호한 스탠스를 유지하며 기술경쟁에 사활을 걸어야 한다"며 "중장기적으로 중국사업은 현상유지를 하는 동시에 대체지를 모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mkchang@fnnews.com 장민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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