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타국 땅에 바친 헌신의 거룩한 삶
戰後 한국 찾은 의료선교사 로빈슨, 장미회 세워 간질환자 치료 앞장
유언대로 유골 일부는 파주에 묻혀
소록도에서 40여년간 헌신 봉사한 마리안느(위사진 왼쪽)와 마가렛 수녀간호사. 아래사진은 두 수녀의 삶을 조명한 휴먼다큐 영화 '마리안느와 마가렛'의 한 장면. 뉴스1
우리나라가 궁핍했던 시절 멀리서 찾아와 헌신 봉사한 의료간호 선교사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메이는 감동을 느낀다. 나는 의료간호 선교사 로빈슨(1904~2009)과 특별한 인연을 맺었다. 지난 1974년 여름 간질환자를 위한 장미회에 깊이 관여해온 외숙 강우식 박사가 SOS를 보내왔다. 환자가 너무 많아 주말에도 진료해야 하는데 일요일 자원봉사 의사가 없으니 도와달라는 전갈이었다.
나는 의대를 졸업해 의사면허는 있었지만 기초의학에 몰입하고 있던 터라 망설이다가 상황이 급박해 매주 일요일 진료를 맡기로 했다. 새벽 5시에 모여 기흥휴게소에서 아침 요기하고 목적지에 8시반 전에 도착해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환자를 보는 일정이었다. 두 시간 이내 지역은 석 달마다 당일치기했고, 그 이상 거리는 여섯 달마다 토요일 저녁에 내려가서 다음날 새벽부터 진료하는 강행군의 여정이었다. 보통 300~400명의 환자를 보았고 어떤 지역은 800명이 넘기도 했다. 그 후 30~40회 넘도록 전국 방방곡곡을 다녔다.
이런 봉사를 처음 시작한 로빈슨 할머니(당시 나는 20대였고 로빈슨은 60대였기에 할머니라고 불렀다)는 간호사와 의사 면허를 가진 특별한 분이었다. 자신의 연금과 교단의 지원금을 들고 전쟁 후 처참한 한국을 돕고자 찾아왔다. 원래 나환자봉사를 하려다가, 어느 날 버스 속에서 발작으로 쓰러지는 간질환자를 보고 이들을 돕기로 했다. 그래서 '가시있는 장미가 아름다운 것처럼 간질환자도 훌륭한 삶을 영위할 수 있다'는 취지로 장미회를 조직했다.
이는 사회적 편견에 시달리던 간질환자에게 사회복귀의 문을 활짝 열어준 계기가 되었다. 전염병이 아니라는 이유로 당국은 대책을 세우지 않았기에 당시 15만명이 넘는 간질환자들은 거의 장미회의 수혜를 받았다. 로빈슨 할머니는 진료받고 처방약을 기다리는 수많은 환자들에게 미소를 지으며 따뜻하게 서투른 우리말로 설명하고 주의를 주었다. 대한간질협회를 창립하는 데도 주역이 되었다. 한 사람의 사랑과 노력이 한 나라의 간질환자 모두에게 도움을 준 위대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분은 봉사 기간이 끝났는데도 귀국하지 않고 봉사를 하다가 아흔 살이 넘어 미국으로 돌아가서 천수(天壽)를 다하고 106세로 세상을 떠났다. 유언대로 유골 일부는 파주기독교인 묘지에 묻었다. 로빈슨 할머니의 따뜻한 미소와 농담을 생각하면서 한없는 감사와 존경의 기도를 드리지 않을 수 없다.
소록도의 두 수녀간호사님과의 만남도 잊을 수 없다. 백세인 조사 과정에서 특수한 환경에서 살아온 한센인의 수명 조사를 위해 2004년 소록도를 방문했을 때, 그들을 40여년 돌보아준 오스트리아 수녀님들이 있다는 말을 듣고 혹시나 한센인의 생활상에 대한 정보를 들을 수 있을까 하여 찾았다. 마리안느와 마가렛 두 분 수녀님이 살고 있는 허름한 집에 찾아가니 거실에는 장식품 하나 없고 벽에 십자가만 덜렁 걸려있을 뿐이었다. 손님이 왔다고 차를 대접해줘 마시면서 한센인의 삶과 고통, 종교에 귀의한 생활상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질병으로 사회와 격리되고 가족들과도 헤어져야만 하는 처지에서도 한센인이 일반인보다 더 높은 수명을 누린다는 의외의 사실을 알게 되어 다음 해 연구진을 재정비해서 소록도를 찾았다. 인사도 하고 몇 가지 추가 질문도 하려고 두 분 수녀님을 찾았는데 이미 떠나버리고 없었다. 연유를 묻자 놀라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 해가 바로 두 수녀님의 은퇴 시기였는데, 어느 날 새벽 첫 배를 타고(당시에는 연륙교가 없어서 소록도는 녹동항에서 배타고 들어갔다) 아무도 모르게 편지 한 장만 남기고 떠나버렸다. 그 동안 고마웠다는 감사와 더 이상 도움이 되지 못하고 폐만 끼칠 것 같아 떠난다는 내용이었다. 환송연도 거부하고 가방 하나에 그 동안 입고 지내던 옷가지 몇 벌만 챙겨 떠났다. 청춘을 바치고 평생을 봉사하고서도 혹시나 환우들에게 민폐가 될까 걱정되어 홀연히 떠나버린 두 분 수녀간호사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가슴이 멍해졌다. 아! 봉사는 이렇게 하는 것이구나 깨닫게 해주었다. 최근 마리안느 수녀님이 투병 중이라는 소식이 들려 안타깝기 짝이 없다. 두 분 수녀님이 건강하기를 간절하게 기도한다.
직접 만나지는 못했지만 선친의 저술 '광주 일백년'에 상당한 지면을 할애해 상세하게 소개된 간호선교사 이야기를 추가하고자 한다. '서서평'이라는 한국 이름을 가지고 있던 엘리자벳 셰핑(1880~1944)이다. 미국에서 출생해 간호사가 되어 선교사로 우리나라를 찾아와 광주제중병원에서 나병과 결핵으로 고생하는 가난한 환자들을 위해 헌신했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배워야 한다며 학교를 세웠고 우리나라 간호협회가 일본에 종속되면 안 된다고 생각해 최초로 조선간호협회를 창립한 선각자였다. 처참했던 나환자들의 복지를 위해서 환자들과 함께 총독부까지 행진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버려진 고아 14명을 입양하고 과부 38명을 모두 자신의 집에서 생계를 해결하도록 하기도 했다. 봉급과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나눠주었기에 막상 본인은 영양결핍으로 시달리다가 일찍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좁쌀 두 되 뿐이었다. 자신의 성격이 조급했기 때문에 반성의 의미로 서서(徐徐)히 하자는 뜻으로 성을 서(徐)씨로 하고 이름은 천천히 할 서(舒)자와 평평할 평(平)자를 붙여 서서평이라고 했다. 머리맡에는 "삶은 성공이 아니라 섬김이다(Not Success, But Service)"라는 글귀를 붙여놓고 항상 자신을 다짐하는 삶을 살았다. 사람들은 그녀를 '조선의 예수'라고 불렀다.
장례는 시민들이 통곡하면서 광주 최초의 시민장으로 열흘에 걸쳐 진행됐고 양림동 선교사묘역에 묻혔다.
평생을 낯선 타국에서 혼신을 다해 헌신과 봉사를 하고서도 아무런 보상도 받지 않고 오히려 조그만 사례도 피하며 떠난 간호선교사들의 삶을 보면서 한없는 사랑으로 가득한 거룩한 삶의 참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런 분들이 우리 주변에 있어서 우리 사회가 이런 발전을 할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하면서 그 분들에게 한없는 감사와 존경을 바친다.
박상철 전남대 의대 연구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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