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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달자에세이] 불안·공포에 떨게 하는 '극한현실', 깨어있는 정신이 필요하다

신달자 시인의 고통이여 나의 친구여 !
너도 익고 나도 익어가고

[신달자에세이] 불안·공포에 떨게 하는 '극한현실', 깨어있는 정신이 필요하다
일러스트=정기현 기자
악전고투의 환경을 무엇으로 극복할 수 있을지 극한의문이 든다. 생존을 위협하는 극한은 새로운 시대의 문제점으로 경악스럽게 찾아온다. 심각한 불안과 공포에서 우리들의 선한 노력이 더 앞서 그 난폭한 극한을 이겨내는 인간의 힘을 보여줄 때가 아닌가 생각하다 눈을 감는다.

우리는 지금 혼란의 여름을 지나고 있다. 여름 들어 가장 많이 듣는 단어가 '극한'이라는 단어다. 없으면 더 좋을 말이다. 극한호우라고 하더니 극한폭염, 극한태풍, 극한대결까지 더 이상 올라가 설명할 수 없는 그야말로 극한까지 오르고 있다. 더욱이 '묻지마 극한사살'이라는 말까지 폭염 속을 오가니 극한고통으로, 극한일상으로 치닫고 있는 형편이다.

가능한 한 어렵게 키우지 않고 부드럽게 자식 키우는 것을 좋은 교육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아이들이 이런 악전고투의 환경을 무엇으로 극복할 수 있을지 극한의문이 든다. 그러니 연약한 몸과 정신으로 닥쳐오는 자연 극한을 무슨 힘으로 부드럽게 지나갈 수 있을 것인지 대비가 필요해 보인다. 그래서 '정신'이란 단어가 이 여름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가령 깨어 있는 정신 말이다.

이제는 교육법도 달라져야 하나보다. 적어도 '극한'이 어디로부터 언제 닥칠지 모르니 수능시험에 극한자연으로부터의 적응과 극복이라는 과목을 통과해야 하는 게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극한사살이라는 문제는 그 동네 이름만 들어도 불안하다. 인연도 없는 관계에서 무차별 죽음의 인연을 도발적으로 갖는 이 극한공포를 도무지 어찌해야 하나.

고통은 생명의 또 다른 이야기다. 삶의 또 다른 이름이다. 이제는 이해보다 극복이 필요한 시대인가. 그 극한을 잘 달래는 일이란 인간이 도약으로 더 잘사는 야망으로 꿈을 이루는 과정에서 높이만 바라보는 일이 아니라 옆과 뒤를 살피며 더불어 공생하는 일이 인간적 소망일 수 있지만, 그래서 정신적 열등감이 사라지는 사회 풍조가 되면 바랄 길이 없겠지만, 과연 그것이 가능하겠는가. 정치는 나의 소망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옆과 뒤를 바라보며 어깨를 나란히 하는 인식이 중요하겠지만, 그것도 가능하겠는가.

하늘의 푸르른 빛과 상형문자 같은 구름을 보며 그 아름다움에서 힘을 얻는 것이 아니라, 바로 옆 사람이 순간적으로 칼을 휘두를 것 같은 극한공포로 우리의 꿈이 뒷걸음치고, "차라리"를 외치며 집 안에서 자신을 누르는 일이 반복될까 극한적으로 겁이 난다.

서현역 사고가 난 뒤 살인예고를 한 범인은 초등학생이라는 기절초풍할 일도 벌어진다. 이런 경우 공포보다 슬픔이 밀려온다. 도무지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 하고, 나도 어느 가수처럼 테스형에게 묻고 싶어진다. 원시시대의 야생성은 이미 우리 유전자에 희미해졌을 것이나 생존을 위협하는 극한은 새로운 시대의 문제점으로 경악스럽게 찾아온다.

우리가 누구를 위로할 때 흔히 "좋아질 거야, 넌 착하잖아"라는 말을 한다. 그런데 제아무리 착하고 성실하게 살아도 기후변화로 다가오는 '극한'의 대처법은 착함으로 대처하지 못할 것이다. 그래, 아닐지 모른다. 착하고 성실하게 잘 대처하라고 해야 할까. "좋아질 거야"란 말이 쉽게 나오지 않는다. 기후환경에 대해 무식하기도 하지만 부정적인 생각은 왜 없겠는가. 인간이 저질러 놓은 환경 문제에선 눈을 감아버리기도 하는 것이다. 말문이 닫힌다.

늘 생각했다. 내 인생에서도 불행과 행운은 함께 왔었다. 불행인가 하면 그 뒤에 행운이 있었고, 행운인가 '으쌰' 하고 잘난 척을 하면 불행이 그 날개 속에 숨어 있었다.

앞으로가 더 중요하다. 사회불안 장애는 지속될 것이다. 그러나 보라, 제아무리 태풍이 와도 8월 햇빛은 아직 그 열기가 식지 않았다. 그 태양의 강열함 속에 모든 곡식들은 익어 가고, 태풍과 극한폭염·폭우에도 그 곡식들은 자기 책임을 다할 것이다. 나무에 매달린 열매들을 보라. 그 찌는 듯한 태양, 생명을 앗아가는 폭우 속에서도 건실하게 매달려 익어 가고 있지 않은가.

그 안에 우리도 겪고 있는 사회 상황에 대한 불안·공포로 극한의 자기통제에 힘이 풀린다면 지금까지 우리 인간 삶에 극한을 헤쳐 나온 역사가 얼굴이 붉어지지 않겠는가.

중학교 2학년 14세 때 일인극을 한 적이 있다. 국어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나는 혼자였고, 주인공이었고, 대사를 잊어버리면 혼자 생각나는 대로 무엇인가 말을 해야 했다. 앞에는 친구들, 선배들, 선생님들이 앉아 무대만 바라보고 있는데 그 공포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엿장수가 지게를 지고 가위를 짝짝거리며 농사를 잘 끝낸 농부 아주머니들에게, 하늘에, 땅에 고맙다고 하는 그런 연극이었다. 선생님이 시키지도 않은 대사 한마디로 웃기지만 인기를 끌었던 연극이다. "농사는 혼자 하는 게 아닙니다"라는 말 한마디로 말이다. 연극이 끝나고 무대를 내려오니, 아 그렇게 평화로울 수가 없었다. 대지의 황홀이 느껴졌던 것이다. 그 무대 아래의 현실이 지금은 무대보다 더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공포증은 불합리하다 생각만 해도 호전된다고 말한 적이 있다. 사회적 상황에 대한 심각한 불안과 공포에서 우리들의 선한 노력이 더 앞서 그 난폭한 극한을 이겨내는 인간의 힘을 보여줄 때가 아닌가 생각하다 눈을 감는다.


미국 저널리스트이자 불안장애 환자인 스콧 스토셀이 쓴 '나는 불안과 함께 살아간다'의 제목이 얼핏얼핏 생각나게 한다. 불안은 풀과 같아서 우리 마음 안에 절로 솟는 감정이다. 그러나 그 불안을 제거하는 안정의 손길이 있다. 계절을 따라 익어가는 열매처럼, 그래 폭풍을 이기고 붉어지는 저 열매들과 눈 맞춰 본다면 "뭐 뭐 때문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다시 힘주어 외쳐야 할 것 아닐는지.

[신달자에세이] 불안·공포에 떨게 하는 '극한현실', 깨어있는 정신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