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운 감독 /바른손이앤에이 /사진=뉴스1
[파이낸셜뉴스] “지난 팬데믹 이후 영화산업이 위축되면서 영화가 이렇게 덧없이 사라지나? 영화란 무엇인가? 여러 상념이 들 때 ‘거미집’ 시나리오를 만났습니다. (각색을 하며) 내가 느낀 여러 상념을 반영했고, 처음 영화를 사랑하게 되면서 했던 질문들을 많이 담았습니다.”
신작 ‘거미집’을 내놓은 김지운 감독의 말이다. 김지운 감독이 자신의 영혼의 단짝 송강호와 데뷔작 ‘조용한 가족’(1998) ‘반칙왕’(2000)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2008) ‘밀정’(2016)에 이어 다섯 번째 호흡을 맞췄다.
'거미집'은 한국영화 암흑기인 1970년대 문공부 산하 공무원이 시나리오 검열을 하던 시기의 영화 현장으로 관객을 초대한다. 앞서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팬데믹 기간 영화와 사랑에 빠진 소년을 주인공으로 한 자전적 영화 ‘파벨만스’를 내놨는데, 영화와 영화현장을 그린 ‘거미집’은 시네필 출신 김지운 감독의 영화 사랑이 듬뿍 담긴 영화다.
■ 걸작 만들고 싶은 한 감독의 고뇌와 광기
“결말을 조금만 바꾸면 아주 걸작이 나올 것 같아. 딱 이틀이면 돼.”(감독) “걸작을 왜 만들어요? 그냥 하던 거 하세요”(제작자) “싹 바뀐 거 같아요. 난 아예 중간부터 캐릭터가 바뀌네”(톱스타) “저 드라마 찍으러 가야 해요! 저 힘들다고 아~까부터 얘기했어요.”(라이징 스타)
‘거미집’은 다 찍은 영화의 결말을 바꿔 걸작을 만들고 싶은 중견감독 김열(송강호 분)이 악조건 속에서 영화 속 영화 ‘거미집’을 완성해내는 과정을 앙상블 코미디로 그린다. 재촬영이 진행된 아수라장 직전의 촬영 현장과 그들이 찍는 영화 속 영화 ‘거미집’의 스토리가 이중 전개되는데, 다양한 인간군상의 욕망이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두 영화가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간다.
또 현실과 이상이 충돌하는 영화 촬영장은 컬러로, 영화 속 영화는 흑백으로 찍었다. 흑백 장면을 위해 당시 실제로 쓰이던 텅스텐 조명을 사용했으며 배우들은 극중극 장면에선 한국영화를 ‘방화’라 칭하던 시절, 그때의 과장된 연기와 말투로 연기를 한다.
장르는 그야말로 짬뽕이다. 극중극이 치정과 멜로, 호러에 재난과 괴기물까지 오가는 강렬한 복수극이라면 촬영 현장은 좌충우돌 그 자체로 짠하고 우스꽝스럽기 그지없는 블랙코미디다.
김지운 감독은 “(1970년대가 흑백영화 시절은 아니었으나) 클래식 영화라는 상징 때문에 흑백으로 찍었다”며 “또 (영화 속 영화를) 이만희 감독의 마의 계단(1964)과 김기영 감독의 ‘하녀’(1960), 히치콕의 ‘싸이코’(1960) 등 흑백영화를 레퍼런스로 삼았기 때문”이라고 이유를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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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거미집' 보도스틸
앞서 김기영 감독 유족들이 김열 캐릭터를 두고 "고인을 모티브로 만든 캐릭터며 영화 속에서 이 캐릭터를 부정적으로 묘사, 고인의 인격권과 초상권을 침해했다"며 상영금지가처분 소송을 냈는데, 결과적으로 잘 마무리가 됐다. 김 감독은 “김기영 감독에 대한 존경과 애정을 잘 전달했고, 유족들이 잘 받아들여줘 오해가 풀렸다”고 설명했다.
김열 감독은 1960년대 한국영화 황금기를 이끌었던 김기영, 신상옥 등 여러 감독들과 시대를 막론하고 창작자라면 누구나 가질 모습을 투영했다. 김지운 감독 자신의 모습 역시 녹아있다.
김 감독은 “내 신조가 최악의 순간이 와도 평상심과 유머감각을 잃지 않는 것인데, 평소에는 잘 유지한다”며 “그런데 현장만 가면 영화가 뭐라고 자학하고 비탄에 빠지고 생각의 나래를 편다. 내가 현장에서 느낀 감정이 김열을 통해 나왔다”고 말했다.
극중 송강호는 정우성이 연기한 자신의 스승이자 고인이 된 당대 천재 신감독의 환영을 만난다. 자신에 대한 믿음과 불신을 오가는 김열에게 신감독은 "너를 믿고 나아가라"고 조언한다. 김감독은 "박찬욱 감독도 어떤 날은 자신이 천재 같고 어떤 날은 쓰레기와 같다고 하시더라"며 "현장에서 나의 감정 역시 그렇다. 고뇌하는 김열은 감독의 초상"이라고 말했다.
극중 촬영장에 불이 났는데도 촬영을 멈추지 않고 밀어붙이는 광기의 모습 역시 김 감독의 경험담이 투영됐다. 그는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촬영할 때 대규모 폭발신이 있었는데, 계획보다 폭탄을 더 집어넣는 바람에 그 불꽃이 옆 세트로 옮겨 붙었다”며 “컷 소리와 함께 전부 다 화재진압하러 달려갔는데, 오직 나만 반대로 달려갔다. 잘 담겼냐고 묻는 내 모습이 너무 강력해 촬영감독이 움찔했을 정도”라고 돌이켰다.
“‘놈놈놈'은 제 영화적 로망이 투영된 작품이라 그만큼 에너지를 많이 쏟았죠. 그때 작업한 배우(송강호 이병헌 정우성)들과 스태프들은 아직까지 정기적으로 만나는데, 애증이랄까, 끈쩍합니다.” ‘밀정’의 이병헌처럼 정우성이 이번 영화에 특별출연한 것도 이러한 관계가 작용했다.
■ '플랑 세캉스'를 여러번 강조 "끝끝내 영화로, 자존심 지켰죠"
‘거미집’에는 ‘플랑 세캉스’라는 영화 용어가 여러번 등장한다. 김열은 바뀐 결말을 ‘플랑 세캉스’로 찍고자 한다. ‘원신원컷’ 즉, 단 한번의 카메라 워크로 완성하는 시퀀스를 말한다. 제작진 모두의 완벽한 합이 필요하다.
김 감독은 “나도 김열처럼 현장에서 왜 나만 이렇게 애를 쓰지? 다 잘되려고 그러는 거 아냐라는 생각이 들때가 있다”고 운을 뗐다. “그러다가 한 장면을 위해 모두가 초긴장 상태로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순간, 감동을 느끼면서 영화는 협동예술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혹자의 말처럼 창작자는 메가톤급 에너지를 쏟아서 관객들에게 깃털만큼의 재미와 감동을 주는 게 숙명인 것 같습니다.”
김 감독은 “온갖 방해와 몰이해를 딛고, 분투 끝에 완성되는 영화 속 영화 ‘거미집’의 현장을 통해, 인생이 늘 온갖 아이러니와 고난을 딛고 앞으로 나아갔듯, 영화 또한 계속되리라는 조심스러운 낙관과 희망을 전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특히 ‘거미집‘은 김 감독의 표현을 빌면 ’팬데믹 이전의 세상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 같다는 비관적인 상황에서 만들어진 작품’이다.
김 감독은 “영화로 기획되기 어려웠던 작품이라 OTT로 가는 것도 고려했으나 영화에 대한 이야기인데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며 “극중 김열 감독처럼 기어코 해냈고, 그런 측면에서 영화의 자존심을 지켰다”며 남다른 감회도 밝혔다.
영화 '거미집' 보도스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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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좋아서 한 일도 어느 순간 환멸을 느낄 때가 있고, 사랑의 온도가 차가워지기도 하잖아요. 이 영화가 역경과 난관에 부딪힌 사람들에게 격려가 돼 잃은 것을 회복하는 계기가 되길 바랐어요. 한 감독이 VIP 시사회 후 뒤풀이에 참석 안해서 이유를 물었더니 '거미집' 보고 기운을 받아 시나리오 쓰러 갔다고 하더라고요. 제겐 최고의 찬사였죠.”
무언가를 완성해낸다는 건 누군가의 고뇌와 열정, 그리고 용기가 필요하다.
송강호는 거미집'을 선택한 이유로 “신선함”을 꼽으며 "새로운 작품으로 소통하고픈 욕망으로 참여했다"고 말했다. “영화관이 아니면 볼 수 없는 무언가가 끊임없이 도전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작은 발걸음이라도 앞으로 나아가고 싶었습니다.” 27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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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shin@fnnews.com 신진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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