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end 문화
(5) 대표 미니멀리즘 작가 댄 플래빈
산업생산물 형광등 빛이 만들어낸 공간
예술적 장치는 줄이고 예술적 경험 확대
댄 플래빈의 빛 1964-1995
어둑한 골목 안 가게 진열장에 세로로 세워져 빛나는 형광등 하나는 댄 플래빈(1933~1996·사진)의 작품을 연상시킬 것이다. 살코기를 더욱 신선하게 보이려고 정육점 유리 진열장의 가로축을 따라 켜놓은 붉은 빛 형광등은 또 어떠한가.
형광등도 알전구나 네온사인처럼 이전 시대의 유물로 변해가는 즈음, 댄 플래빈의 작품은 더욱 시적으로 빛난다. 그가 대량 생산된 규격품인 형광등을 조형적 단위로 삼아 작품을 펼치기 시작했던 때가 1960년대다. 마르셀 뒤샹이 변기를 전시회에 제시한 이래, 현대미술 작품에서 사물과의 경계가 모호해졌다.
예술과 사물 간의 차이가 첨예하게 문제 시 된 것은 상품을 비롯한 인공물이 넘치는 시대의 일이다. 수백년 전 평소에 밭을 갈던 농부가 교회나 성당에서 벽화나 천정화, 스테인드글래스 등을 접할 때 예술과 사물은 절대 헷갈릴 일이 없었다. 하기야 성(聖)과 속(俗)이 구별된 시대는 예술이 자율화되기 이전이지만 말이다.
그 구별이 점차 와해된 시대, 미술관은 희미해진 성스러운 전통의 마지막 후계자로 자임한다. 기계복제와 더불어 사라진 아우라의 복구가 관건이었다. 빛을 동반함으로서 명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댄 플래빈의 작품은 같은 공산품 소재여도 그와 동시대 작가들의 상품 물신적인 피상성이나 공사판 자재 같은 거칠음과도 차이가 난다.
모더니즘과 미니멀리즘, 그리고 그 이후라는 현대미술사의 중대한 흐름에서 그의 위치는 독특하다. 작품과 이론으로 당대 미니멀리즘의 선명성을 제시한 도날드 져드와도 동지였던 댄 플래빈의 역사에 대한 감각은 미국 콜롬비아대학에서 미술사를 수학한 이력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러시아의 구성주의자 타틀린의 '제3 인터내셔널을 위한 기념비'를 소재로 한 그의 작품은 미술의 역사와 진지하게 대화한 흔적이다. 1920년대 유럽과 소비에트의 문화예술계를 지배했던 구성주의는 기존의 예술이 아닌 산업 생산물이나 그 생산 방식에 주목했다.
하지만 이데올로기나 디자인으로 해소되는 것 이상의 무엇, 즉 현대의 보편화된 사물인 상품과의 창조적 대화가 필요했다. 댄 플래빈이 뉴욕에서 첫 개인전을 연 1960년대 초에 삶으로 해소되는 흐름이나 미술만의 매체적 특수성만 강조하는 모더니즘은 한계에 봉착했다. 예술과 사물의 관계부터 재설정돼야 했다.
마이클 프리드는 1967년에 내놓은 '예술과 사물성(Art and Objecthood)'에서 순수성을 통해 순간의 영원성을 붙잡으려던 모더니즘과 그 이후의 흐름을 예술과 사물이라는 키워드로 짚었다.
모더니즘의 정점이자 대안이었던 미니멀리즘은 지속에 대한 감각을 통해 예술작품 없이도 예술적 체험이 가능한 확대된 장을 예시했다. 미니멀리즘은 순간의 영원성에 고정된 시각을 넘어, 시간의 추이에 반응하는 현존(presence)을 중시한다.
댄 플래빈의 경우, 예술적 장치를 최소화하고 그것이 자아낼 수 있는 경험을 극대화한다는 점에서 미니멀리즘이다. 그 유파의 전형적인 공산품 소재와 달리, 형광등은 빛이라는 형이상학적 주제를 끌어들인다. 미는 단지 미에 한정되지 않고 하이데거를 포함한 철학자들이 환기하는 것처럼, 빛나는 진리와도 관련된다. 한스 블루멘베르크의 에세이 제목처럼, '진리의 은유로서의 빛'이다.
물론 이전 시대처럼 빛이 전적으로 초월적일 수는 없다. 댄 플래빈의 형광등은 자체발산적인 것이 아니라, 문명이 조작하는 빛, 즉 조명(illumination)에 속하기 때문이다.
어둑하게 연출된 곳에서 빛나는 그의 작품은 하나의 대상을 넘어 무대 같은 공간에서 몸의 지각을 강조한다. 예술의 단단한 토대는 지각의 일과성(temporality)으로 와해된다. 그 대신 연극적 무대에 진입한 관객은 과거와 미래가 지속하는 현재적 상황에 온전히 몰입하게 된다.
이선영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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