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부칼럼 >

[마동훈의 위험한 생각] 포퓰리스트 정치인 식별법

화려한 말재주 SNS 달인
'우리' 보다 '국민' 내세워
미래 국가대계 관심 없어

[마동훈의 위험한 생각] 포퓰리스트 정치인 식별법
마동훈 고려대 미디어학부 교수
제22대 총선의 열기가 서서히 달아오르는 이즈음 독자들에게 꼭 권하고 싶은 책은 다시 한번, 막스 베버의 '소명으로서의 정치'(1919년)다. 정치인이 되려면 어떤 준비를 해야 하고, 또한 국민은 어떤 사람을 이 시대의 정치인으로 뽑아야 하는지에 대해 큰 통찰력을 주는 고전이다. 여러 의미에서 이 책의 한국어 제목으로는 '직업'이 아닌 '소명'으로서의 정치가 더 적합한 것 같다.

선거에서 이기지 못한다면 온갖 명분이 다 무슨 소용이냐고 얘기하는 정치인, 그때는 맞았지만 지금은 틀리다고 너무 쉽게 말 바꾸는 정치인, 오직 지역구의 승리만을 위해 국가와 전체 국민을 위한 공의에는 쉽게 눈감을 수 있는 정치인을 우리는 대중영합적 포퓰리스트라고 부른다. 흔들리지 않는 팬덤 지지층 사이에서의 열광적 인기는 정치인에게 현실적으로 매우 큰 자산이다. 그러나 그 대중적 지지를 확보하는 과정에서 소명으로서의 정치가 지향해야 할 천사적 대의를 쉽게 포기하고 직업으로서의 정치를 위해 악마적 수단과 끊임없이 타협한다면, 이는 백년 전 한 지식인의 독일 청년들을 향한 진정성 있는 고언에 대한 배신이다.

대중영합적 포퓰리스트 정치인을 식별하는 방법은 매우 분명하다. 첫째, 이들은 매우 말을 잘한다. 화려한 수사와 은유의 표현에 매우 능숙하며, 그 말을 유튜브나 소셜미디어를 통해 적시에 효율적으로 실어 나르는 일의 달인이다. 이 과정에서 소위 '스핀 닥터'로 불리는 여론몰이 기술자가 자주 등장해 정치인의 가식적 열심이 국민을 위한 진정한 '열정'으로 읽히도록 오도한다.

둘째, 포퓰리스트 정치인은 '나' '우리' 같은 일인칭 화법보다 '여러분' '국민들' 같은 이인칭, 삼인칭 화법을 즐겨 쓴다. 이인칭, 삼인칭 화법의 효과는 언술의 책임 소재를 교묘하게 은폐하는 데에 있다. 유권자가 원하는 것을 가장 앞세우는 듯한 정치인의 화술에 말려들다 보면 정작 정치인이 지역구와 국가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과 비전은 매우 모호해진다. 현란한 화법의 유희에 의해 정치인의 '책임성' 영역은 기술적으로 가려진다.

셋째, 포퓰리스트 정치인은 오늘과 내일을 이야기할 뿐 내일 너머 미래의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당장 다가온 선거일은 내일이고, 임기는 4년이기 때문이다. 내일의 승리가 중요할 뿐 미래의 지역구, 미래의 국가 대계는 의식 밖의 영역이다. 정치는 현실일 뿐 미래에 대한 것이 아니라고 얘기하기도 한다. 내일 혹은 4년 이상을 보지 못하는 정치인, 현재와 미래 사이에서 최소한의 '균형감각'이 없는 정치인에게 소명으로서의 정치를 기대하기 힘들다.

국가와 사회의 다음 세대에게 던지는 꿈과 비전의 메시지가 없는 정치인에게 이 사회의 미래를 맡길 수 없다. 미래를 향한 꿈과 비전은 우리 사회의 아픔과 역경에 대한 매우 직설적이고, 정직하고, 진정성 있는 현실 문제의식에서 시작해야 한다. 경제가 어렵지만 함께 헤치고 나가보자, 사회의 불균형 문제가 심각하지만 함께 바꿔 나가보자, 아직 멀었지만 공정과 평등의 가치를 같이 세워보자고 당당히 주장하는 정치인을 찾기 힘들다. 대의를 위한 정면승부보다는 사탕발림식 위로의 정치, 상대 정당과 이전 정권을 탓하는 정치, 상대방의 실투를 움츠리고 기다리는 정치에 더 익숙하다. 제3지대 신당론 진영에서도 남 탓 논쟁만 들릴 뿐 꿈과 희망의 메시지는 보이지 않으니 국민들만 답답한 노릇이다.

우리는 역사 속에서 두 가지 상반되는 유형의 정치인을 봐 왔다. 첫째는 '정치를 위해 사는' 정치인이고, 둘째는 '정치에 기대어 사는' 정치인이다.
유감스러운 점은 이 시대에 막스 베버가 언급한 신념윤리와 책임윤리를 모두 갖춘 정치인, 즉 정치를 위해 사는 정치인은 매우 드물다는 것이다. 반면 정치에 기대어 사는 정치인, 포퓰리스트의 길을 가는 정치인은 차고 넘친다. 이제 국민이 할 일은 이들을 잘 식별해 내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