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에게 나를 보낸다' 스틸컷 / 출처=영화진흥위원회 DB
관객에게 영화를 가르쳐준 스승이 있을까? 그럴 순 없다. 영화는 상품일 뿐이다. 그게 내 영화관이다. 그런데도 스승의 날을 앞두고, 순전히 개인적인 영화의 스승들을 고백한다. 그들은 일개 영화 관객인 나를 모른다. 알 방법도 없다. 그러니 고백한다.
■유지나
내가 처음 실제로 ‘본’ 영화평론가였다. 내내 TV로만 보던 유명한 사람이었다. 학생회에서 축제 때 초청한 ‘남의 학교’ 교수였다. 3층이었던가, 강의실에 바쁘게 들어왔다. 그는 남의 학교 학생들에게 다짜고짜 반말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본인 소개도 생략하고 열변을 토했다. 그 영화가 배우상을 받는 건 말이 안 된다, 화가 난다, 그래서 이번에 들어간 다른 영화상 심사에서는 미리 초를 쳐놨다, 그런 이야기. ‘아, 영화를 저렇게 볼 수도 있구나’ 싶었다. 그를 화나게 만든 영화는 ‘너에게 나를 보낸다’(1994)였다.
그날 이후, 나는 확실한 배우관이 생겼다. 기껏해야 메릴 스트립이 연기를 잘한다는 글을 읽고 그리 믿었고 그렇게 떠들었을 뿐이다. 내 관점이 없었다. 관점이 있으면 영화가 더 재밌다는 걸 배웠다.
그래서 생긴 내 배우관. ‘너에게 나를 보낸다’의 정선경은 대종상을 받아 마땅했다. ‘엽기적인 그녀’(2001)의 전지현이 대종상뿐만 아니라 모든 상을 받았어야 마땅한 것처럼. 또 ‘스카우트’(2007)의 엄지원처럼, ‘고고70’(2008)의 신민아처럼. 그 배우가 아니면 그 영화가 성립할 수 없는 배우가 상을 받아야 한다, 그게 내 배우관이다. 내가 맞냐고? 틀리면 어떤가, 관객인데.
■심영섭
그는 영화에 심리학을 접목했다. 전공을 좋아하는 영화와 합쳤다. 그는 “심리학과 영화를 두루 섭렵했다.” 그래서 심-영-섭.
그런 방법론으로 쓴 그의 평론을 읽으며, 나는 정말 정말 정말 크게 깨달았다. 내 인생에서 가장 많은 돈과 시간을 들였던 대학 전공을 활용해 영화를 볼 수도 있구나. 그전만 해도 전공은 전공이고 영화는 영화였다. 이때부터 내 영화 세상이 넓어졌다.
영화계 취업 준비생 강의를 나가면 늘 하는 잔소리도 그거다. 당신의 전공이 뭐든 그걸 활용하라. 막상 영화 비전공자들은 자신이 없다. 영화를 안 배웠다고 여긴다. 영화 전공자들도 자신이 없다. 무려 예술인 영화를 막상 팔자니 막막하다.
그럼에도 전공을 활용하라, 억지로라도. 얼마나 경쟁력 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런데 그것밖에 없지 않은가. 심영섭을 보라. 그가 증명했다. 아니, 취업이 아니더라도 영화가 넓어진다, 확실히.
■김형석
그의 글은 언제나 반드시 와닿는다. 나만 그런 게 아니다. ‘응답하라 1994’의 그 ‘혜란 언니’도 그의 연재 글이 좋다고 나에게 전했다. 나에게 전한 건 나와 이름을 헷갈린 탓이다. 내가 전하겠노라 했는데 여기서 이제야 전한다.
그의 영화 이야기가 매력적인 건, 그 영화를 보고 싶게 만든다. 그가 언급한 영화들은 언젠가는 보겠다고 리스트에 넣어둔다.
그런데 그건 내가 즐기는 것이고, 그에게 배운 건 따로 있다. ‘캐릭터’다. 술자리에서 뭔가 내가 물었더니 그는 몇 번을 “성격이 원래 그래”라고 답했다. 그 순간, 나는 그동안 당최 모르겠던 걸 명확히 이해했다.
캐릭터에 관해, 그 중요성에 관해, 그 많은 감독과 제작사 대표와 프로듀서가 나에게 친절히 설명해줬다. 하지만 나는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당연히 내 문제다.
이제 나에게 영화 캐릭터란 그에게서 배운대로 “성격이 원래 그런 무언가”다. 그래서 영화라는 건 그 성격대로 끝까지 가느냐, 바꾸느냐다.
■김미현
그의 제자들이 우연찮게 나의 수강생과 겹쳤다. 그들에게 들은바, 그는 좋은 선생님이다. 나도 동의한다. 나에게 A+를 줬으니까.
꽉 찬 강의실. 교양과목이었다. 그는 인기 강사였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를 이야기할 때였다. 한참 이야기하다 말고, 갑자기 시간 지나면 변한다고 했다. 처음 볼 땐 그저 그랬는데 다시 보니 와닿더랬다. 몇 가지 의문이 들었다. 소설을 다시 읽을 수도 있는데 왜 굳이 영화를 다시 본 걸까, 시간이 지난다고 어떻게 변한단 말인가. 그때 나는 그의 말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어쨌거나 쉽게 학점 채울 과목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시간이 지났고. 나는 그걸 경험했다. 그는 단순히 영화가 좋아졌거나 나빠졌거나 그런 이야길 한 게 아니었으리라. 내가 그에게 배운 건 이거다. 영화는 경험이다. 영화는 시간이다. 영화는 기억이다. 그의 진짜 의도는 모르겠지만.
■정성일
유덕화부터 이야기해야겠다. 그 유덕화 말이다. 내가 만났던 배우 중에 가장 떨렸다. 인터뷰 중 유덕화가 내 눈을 보며 말하자 얼어버렸다. 그럴 수밖에. 나는 그의 영화를 롯데월드에 있던 롯데시네마에서 몇 편을 봤더랬다. 이 이야길 나는 주윤발로도 바꿀 수 있다.
그런데 그들에겐 떨기라도 했지. 정성일 ‘아저씨’에겐 인사도 못 하겠다. 몇 번 기회가 있었고 또 몇 번은 옆자리에서 영화를 봤다. 인사를 해야 하는 상황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뿐이었다. 까딱. 그가 어렵다.
나는 그의 평론에서 영화를 배운 게 없다. 그의 글을 읽은 건 몇 편 되지도 않는다. 너무 길다. 심지어 번역체다. 그가 어려운 이유는 따로 있다. 그는 라디오에서 내 영화 글을 처음 뽑아 ‘주셨다’.
이제 그는 더 아저씨가 됐고, 나도 충분히 아저씨가 됐다. 그 시간 동안 그의 말 중에 어떤 건 명확히 알고 어떤 건 아직도 모르겠다.
가령 왜 당신이 연출한 ‘카페 느와르’(2010)에서 문어체 대사를 썼는지 아주 명확히 알고(물론 내 식으로), 왜 당신이 ‘영알못’ 트뤼포의 몇 줄을 복음으로 전파하는지는 아직도 모르겠다(트뤼포는 영화를 정말 모르는 사람이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가 라디오에서 소개한 ‘복수무정’이 나에게 제때 도착했다는 것. 그렇기에 이 글도 그의 글의 외형만 따라 길게 쓰는 참이다.
영화 평론가들의 영향력은 점점 내려가고 있다.
영진위 영화소비자 행태 조사 보고서(2023)에 따르면, ‘전문가 평가’는 관객이 영화를 선택할 때 고려하는 요인 17개 중 15위(33.3%). 관객에게 그들의 평은 영화의 제작국가(14위, 33.9%)보다 중요하지 않다.
물론 지금 관객을 분명 누군가가 인도하고 있으리라. 영화사들이 믿듯이, ‘새로운 시대’의 인도자는 유튜버들일 수도 있고. 그러니 영화 평론가들의 영향력이 낮아지는 건 안타까울 일도 아니고 새삼스럽지도 않고 심지어 내 개인적으로도 알 게 뭔가.
그저 나는 밝히고 싶었다. 나는 어떤 관객인지, 원하는 것이 뭔지, 어디서 온 관객인지. 나는 저들에게 영화를 더 재밌게 보는 방법을 배운 관객이고, 그래서 ‘영광의 시대’에 영화를 보았노라. 새로운 관객에게 묻나니, “그대들은 어떻게 영화를 볼 것인가.” 한 명 추천한다. 김철홍 영화평론가. 마침표.
김형호 영화산업분석가
jashin@fnnews.com 신진아 기자
※ 저작권자 ⓒ 파이낸셜뉴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