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천 서강대 국제대학원 교수
"한 주는 정치에서 긴 시간이다." 해럴드 윌슨 전 영국 총리의 이 발언은 정치 상황이 짧은 시간 안에 급변할 때 영미 정치권에서 자주 인용되곤 한다. 미국 대선까지 5개월 정도 남았다. 정치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져도 놀랍지 않은 긴 시간이지만, 추세는 조 바이든 대통령에게 불리해 보인다. 바이든의 고령 핸디캡과 좀처럼 잡히지 않는 인플레이션 그리고 우크라이나와 가자 전쟁 등 외교정책에서의 어려움 등이 주된 이유로 꼽힌다. 여기까지는 잘 알려진 내용인데, 우리가 잘 모르는 이유도 있다.
바이든은 '법질서(law and order)' 영역에서 도널드 트럼프 후보에게 밀리고 있다. 최근 미국을 방문한 사람들은 느꼈겠지만, 마약과 이와 연관된 범죄가 심각한 상황이다. 다수의 미국인은 바이든이 마약과 범죄에 유약하게 대처해 치안 상태가 악화했다고 믿고 있다. 2020년 5월 조지 플로이드라는 흑인 남성이 위조지폐 사용 혐의로 체포되는 과정에서 경찰에 의해 질식사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경찰의 과잉진압을 규탄하는 대규모 시위가 발생했고, 시위대와 경찰의 무력충돌로 이어졌다. 시위는 미국 전역으로 번졌는데, 이때 급진 좌파 진영에서 들고나온 구호가 "경찰 예산을 끊어라(defund the police)!"였다. 경찰을 아예 해체하자는 주장이었는데, 시위대 편 사람들에게는 솔깃한 구호였을지 몰라도 일반 국민은 매우 과격하다는 반응이었다.
바이든은 임기 초반 급진 좌파 세력에 끌려다닌 경향이 있다. 이들의 눈치를 보느라 마약과 범죄 문제에 강력히 대응하지 못했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이에 비해 대통령 당시 트럼프는 시위진압을 위해 주방위군까지 투입했는데, 그래서인지 유권자들은 법질서 확립을 잘할 수 있는 후보로 트럼프를 더 많이 꼽고 있다.
바이든은 '문화전쟁(culture war)'에서도 트럼프에게 밀리는 양상이다. 우선 '워키즘(wokism)'이다. 원래 소수인종과 성소수자에 대한 편견과 차별에 '깨어(woke)' 있자는 사회운동으로 시작했는데, 지금은 극단적 양상으로 변질되어 미국 사회를 지탱하는 가족가치와 기독교가치를 좀먹고 있다는 인식이 팽배하다. 다수의 미국인은 좌파 정치인이 워키즘을 정책에 반영하려는 시도에 비판적이고, 트럼프만이 이런 문화 좌파로부터 미국의 전통적 가치를 지켜줄 정치인이라고 인식하고 있다.
다음은 '이민' 문제다. 트럼프의 멕시코 국경장벽을 비난하던 바이든은 포용적 이민정책이 재선 가도의 발목을 잡을 수 있다고 판단했고, 2023년 10월 입장을 바꿔 국경장벽 건설을 재개하기로 했다. 그럼에도 유권자들은 이민 문제를 잘 다룰 후보로 트럼프에게 월등히 높은 점수를 주고 있다. 바이든은 입장 선회 후 히스패닉 유권자의 표심을 잃고 있다.
문화전쟁에서 '낙태'만이 바이든에게 유리한 이슈다. 여성 표가 바이든으로 결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낙태에 대한 트럼프의 입장은 오락가락했다. 오랜 기간 낙태권을 찬성했지만, 공화당원으로 정치를 시작하면서 견해를 바꿨다. 2022년 미국 대법원이 낙태권을 인정한 1973년 '로 대 웨이드(Roe v Wade)' 판결을 뒤집는 결정을 내렸을 때 자신이 판결 번복을 이끈 대법관 세 명을 임명했다고 자랑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최근 입장을 슬그머니 바꿨다. 지난 4월 애리조나주가 낙태금지법을 통과시키자 과했다며 본인이 대통령이 되면 연방정부 차원의 낙태금지법을 거부할 것임을 다짐했다. 바이든과 달리 트럼프는 주요 사안에 대한 입장을 바꿔도 컬트와 같은 그의 팬덤은 여전히 견고하다.
올해 3월 바이든이 국정연설 후 지지율이 오르며 박빙인 여론조사 결과가 나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국정연설의 컨벤션 효과는 다했고, 다시 트럼프의 반등이 시작됐다. 바이든은 트럼프와 6월 말 맞짱토론을 한다. 일종의 조기 승부수인데, 바이든은 반전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 추세를 보면 쉬워 보이지 않는다.
김재천 서강대 국제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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