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레의 신에게 선택받아"
춤 때문 힘들 때마다 생각
발레가 인생, 무대가 전부
김지영 경희대 무용학부 교수
2011년부터 매년 열리고 있는 대한민국 발레 축제는 발레의 저변을 확대하기 위한 축제로 국내에서 활동하는 발레단과 무용인들이 참가해 다양한 발레 작품을 선보이며 관객과 소통하는 문화 축제이다. 클래식과 현대무용 외 실험적인 작품들도 선보이며 기존의 프로 발레단과 프로 무용수뿐 아니라 민간 발레단과 프리랜서 무용수들의 예술활동을 지원해주고 다양한 작품을 선보일 수 있는 기회의 장이기도 하다.
발레 축제에서 기획한 '발레 레이어'라는 갈라공연은 레이어(layer)라는 단어에 걸맞게 과거 프로단체에서 활동하다 은퇴한 무용수들, 현재 프로에서 활동하고 있는 무용수들, 미래의 프로 무용수가 될 학생 무용수들이 모여 무대를 꾸몄다. 이번에 나는 과거를 담당하게 되었는데 유니버설발레단과 국립발레단에서 수석무용수로 활동하다 현재는 은퇴하고 무대를 잠시 떠나 있었던 황혜민 전 유니버설 수석무용수, 김세연 전 유니버설 수석무용수, 신승원 전 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 그리고 과거 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로 활동했던 나까지 포함한 네명의 무용수들이 '파 드 캬트르'라는 작품을 선보였다.
이 작품은 1845년 영국의 허 마제스티극장의 오페라감독인 벤자민 럼리가 기획하고, 쥘 페로의 안무로 당시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스타 발레리나 네 명을 동시에 무대에 올린 작품이다. 당시 4번의 공연 이후 무대에 올려지지 않았고, 거의 100년이 지난 1941년 안톤 돌린의 버전으로 세상에 다시 나타나게 되어 초연의 스텝은 남아있지 않지만 당시 작품이 만들어진 배경이나 발레리나들의 신경전 이야기는 지금까지도 전해진다. 19세기 유럽에서 가장 유명했던 마리 탈리오니, 파니 체리토, 카를로타 그리시, 루실 그란을 캐스팅하여 공연을 하게 되었는데 아무래도 유명한 발레리나들을 동시에 무대에 올리다 보니 그들 사이에 견제와 신경전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누가 마지막에 등장하는가, 어떤 안무를 하게 되는지, 자리·배역·분량 등에 대한 신경전이 있었다고 한다. 결국 분량은 공평하게 하면서 등장 순서는 나이순으로 제일 연장자인 마리 탈리오니가 마지막에 등장하게 되었고 각자 발레리나들의 장점을 안무에 넣어 각자의 춤을 최대한으로 돋보이게 했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친분이 있는 선후배 관계라 그들과 달리 연습시간이 너무나 즐거웠고, 서로 배려하며 과거의 유명했던 발레리나들과 같은 어떠한 견제 같은 것도 없이 행복한 마음으로 무대에 설 수 있었다. 그들은 발레단 시절 모두 최고의 기량을 선보였던 훌륭한 무용수였고, 발레 팬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다. 나이가 들어 은퇴하게 된 후 그때와 같은 몸 상태와 기량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사실 무리라고 할 수 있겠지만 무대를 대하는 마음과 춤에 대한 열정은 그 어느 때보다 뜨거웠고, 우리들은 완벽한 무대를 선보이기 위해 더욱더 열심히 연습했으며 최선을 다해 현재의 몸 상태를 백 프로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그래서 즐거운 마음으로 서로를 응원하며 행복한 마음으로 공연할 수 있었고, 서로에게 시너지가 되어 진심으로 춤을 즐기는 무대를 만들 수 있었다. 또한 선배로서 발레계를 이끌어 갈 후배들의 춤을 보며 즐길 수 있었으며 발전된 기량과 실력에 감탄하고 뿌듯한 마음이 드는 나를 보며 나도 이제 나이가 들었다는 것을 실감했다.
그리고 과거의 나는 선배들에게 믿음을 주고 현재의 그들처럼 감탄하게 했던 후배였을지를 생각하게 되었다. 발레단 활동 시절 춤 때문에 고민하고 힘들 때마다 최태지 단장님께서는 발레의 신에게 선택받은 것이라는 말씀을 하셨다. 요즘 인생의 반 이상을 발레리나로서 살아온 삶이 발레의 신으로부터 선택받은 것이라는 생각이 진심으로 든다.
내가 스스로 선택했다기보다 선택받았기 때문에 발레 외에 다른 것을 생각할 수 없고 발레가 인생이고 무대가 전부인 것이다. 나뿐만이 아니라 무대에 서고 있는 우리 무용수들은 선택받았기에 무대에 설 수 있는 것이다. 발레의 신에게 선택받은 것이 축복일지, 저주일지는 각자의 선택에 달렸다.
김지영 경희대 무용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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