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원경 울산과학기술원 교수·글로벌산학협력센터장
데이터가 돈이 되는 세상이란 말을 들은 지도 상당한 시간이 흘렀다. 상품과 서비스의 자유로운 이동을 규정한 관세무역일반협정(GATT)이나 세계무역기구(WTO) 규정은 디지털 재화나 서비스는 물론이고 데이터에 대한 별도의 규정이 없다. 국경 간 데이터의 이동이 상품과 서비스의 이동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상회하는 상황에서 데이터 안보와 주권을 둘러싼 디지털 규범 정립에 대한 이해는 반드시 필요하다. 국제무역에서 디지털 무역이 차지하는 비중이 확대되면서 양자·다자 간 디지털 통상 규범에 대한 협상이 다양하게 진행되고 있다. 규범 정립의 양대 산맥이라 할 수 있는 미국과 중국의 대립을 보자. 국경 간 자유로운 데이터의 이동을 주장하는 미국의 규범과 데이터에 대한 국가주권 및 통제권한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중국의 규범은 상반된다. 이러한 구도 속에서 우리를 비롯한 많은 국가들은 다양한 수준의 데이터 현지화 조치를 취하고 있다. 이러한 현지화 조치가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의 정책과 배치된다는 것이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자신의 업적으로 미국·멕시코·캐나다(USMCA) 협정을 내세운다. 이 중에 트럼프 전 대통령의 비밀병기가 있다. 그는 2020년 발효한 USMCA의 전신인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에 포함되지 않은 디지털 무역의 중요성을 반영, 무려 한 챕터를 구성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서는 단지 국경 간 전자정보 흐름에 불필요한 장벽을 부과하거나 유지하는 것을 자제하도록 노력하는 규정을 두고 있을 뿐이다. 반면 USMCA는 국경 간 정보이전을 제한하거나 금지하지 말 것을 의무로 규정한다. 한미 FTA에는 없는 컴퓨팅 설비의 지역화(localization) 조치 요구 금지와 소스코드 공개 요구 금지도 의무규정으로 포함했다. 어떤 국가가 자국의 인터넷 서비스 제공자를 통한 데이터의 저장과 처리만 허용하는 것을 요구할 경우 이를 원천적으로 봉쇄한다는 게 미국 입장이었다. 정부가 알고리즘이나 프로그램 설계도에 해당하는 소스코드 공개를 기업에 요구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 미국은 오래전부터 자국의 빅테크 기업들이 차지한 과점적 지위를 유지하는 방향으로 디지털 통상 규범을 만들려는 속셈이었다.
여세를 몰았나? 미국·일본 디지털통상협정(USJDTA)이 체결되어 2020년 발효되었다. 이 합의는 미국과 일본이 국제 규칙 제정을 주도함으로써 국가 주도로 데이터를 통제하는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목적에서 이루어졌다. 중국은 자국에서 데이터 비즈니스를 하는 사업자에 대한 감시를 강화해왔다. 음악·영상 등 국경을 초월해 판매되는 디지털 제품에 관세를 부과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USMCA 내용을 이 협정에 고스란히 담았다.
"자유로운 정보의 이동은 많은 기회를 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한국 정부가 데이터 현지화 규제를 피해줄 것을 촉구한다." 이 말은 트럼프 대통령 당시 해리 해리스 주한 미국대사가 한 말이다. 현지화 조치는 다국적기업의 고정사업장 은폐를 통한 세금탈루를 방지하기 위해서도 필요하다는 입장이 유럽을 비롯하여 광범위하게 펼쳐진 상황이었다. 별도의 고정사업장 없이 인터넷망을 이용해 서비스 제공이 가능한 글로벌 빅테크 기업의 탈세행위는 세계적 지탄 대상이었다. 저세율국에 페이퍼컴퍼니를 만들어 소득을 이전하는 방법으로 막대한 이익을 취한 것은 야만적이다.
유럽연합(EU)은 디지털 싱글마켓을 목표로 하고 있지만 독일은 데이터 지역화를 주요 내용으로 새로운 클라우드 이용규칙을 마련했다. EU 역내에서 현지화 요건을 금지하고자 하는 디지털 싱글마켓 전략과 배치되는 행위로, 제도적 충돌이 불가피한 상황이다. 미국 재선의 결과를 알 수 없지만 트럼프 전 대통령의 전례를 보면 디지털 무역을 둘러싸고 디지털 교육, 법률, 의료, 금융 서비스 전 부문에서 한바탕 폭풍이 불어올 것 같다.
조원경 울산과학기술원 교수 글로벌산학협력센터장
※ 저작권자 ⓒ 파이낸셜뉴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