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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초포럼] R&D 거버넌스가 문제다

[서초포럼] R&D 거버넌스가 문제다
이병헌 광운대 경영학부 교수
정부와 여당에서 '과학기술계에 카르텔이 있다'는 주장이 나온 뒤 대폭 삭감됐던 연구개발(R&D) 예산이 내년에는 회복될 전망이다. 정부가 국회에 제출한 내년도 R&D 예산은 올해보다 11.8% 늘어난 29조7000억원이다. 1%대 저성장이 굳어질 것으로 전망되는 가운데 정부가 R&D 투자를 확대한 것은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다.

내년 초 미국 트럼프 행정부가 출범하면 미·중 간 기술패권 경쟁이 가속화되고, 국가 간 첨단기술 R&D 경쟁도 심화될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 경제가 수출을 확대하고 일자리를 늘리기 위해서는 인공지능, 바이오헬스, 차세대 이차전지, 시스템반도체, 로봇 등 첨단기술 개발과 사업화에 대한 정부와 기업의 투자가 확대돼야 한다.

그렇다면 R&D 투자를 늘리기만 하면 첨단기술 개발과 사업화가 자연스럽게 이뤄질 수 있을까. 윤석열 정부 출범 초기에 R&D 예산을 삭감하자는 논의가 촉발된 것은 지난 20여년간 늘어난 R&D 예산에 비해 눈에 띄는 경제적 성과는 별로 없었다는 지적 때문이다. 이를 '코리아 R&D 패러독스'라고도 하는데, 우리나라 R&D 시스템의 비효율성으로 인해 R&D 투자를 늘려도 신산업 창출이나 수출 증대 등과 같은 경제적 성과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주장이다.

윤석열 정부는 R&D 시스템의 효율성이 낮은 원인을 '과학기술계의 카르텔'에서 찾았다. 일부 연구자집단이 서로 짜고 정부 R&D 사업비를 타내서 쓸모없는 연구에 쓰고 있으므로 경제적으로 괄목할 만한 성과가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의식 때문인지 그동안 정부가 내놓은 R&D 혁신방안은 연구과제 선정과 성과평가 체계를 개선하는 데 치우쳐 있다. 혁신적이고 도전적 R&D 과제를 선정해서 지원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진단과 대안은 우리나라 정부 R&D 사업의 생산성이 낮은 근본 원인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결과이다.

우리나라 정부 R&D 사업의 낮은 생산성, 특히 사업화 성과가 낮은 근본 원인은 낡은 거버넌스에 있다고 할 것이다. 정부 각 부처와 지자체에서 연간 7만개 이상의 R&D 과제를 지원하고 있으나, 각 과제에 대한 정부의 R&D 자금 지원방식과 연구과제 관리방식은 과거와 크게 변하지 않았다. 1982년 '특정연구개발사업'이 시행되면서 도입된 방식으로, 정부는 주관연구기관을 선정, 협약을 체결하고 연구자금을 출연해 준다. 주관연구기관은 지원받은 연구비와 연구업무 일부를 다른 연구기관에 위탁해 수행토록 한다. 정부가 출연한 연구비는 협약으로 사전에 정해진 지출항목으로만 쓰일 수 있는데, 연구 수행에 직접 필요한 지출만 인정되며 연구수행 기관이나 연구 참여자의 이익으로는 쓸 수 없다.

정부와 연구기관 사이에 이런 협약을 통해 R&D 과제의 거버넌스가 형성된다. 하지만 이는 신제품이나 서비스를 출시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R&D 과제의 성과를 관리하기에는 매우 부적합하다. 협약의 주된 내용은 정부가 지원한 연구비의 사용에 관한 것이고, 연구의 목표 달성을 위해 연구기관과 연구자에게 부여된 권한과 책임, 그리고 성과에 대한 보상을 명확히 규정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거버넌스하에서 연구자들은 각자 주어진 연구비를 규정대로 사용하면서, 자신에게 할당된 세부 연구과제를 수행하고 논문·특허·산업체 기술이전과 같은 성과를 개별적으로 생산하게 된다.
그 결과 정부 R&D를 통해 산출되는 논문과 특허, 기술이전 실적은 꾸준히 증가했다. 하지만 신산업 창출과 같은 괄목할 만한 성과는 별로 없었다. 정부 R&D가 파급력 있는 성과를 창출하기 위해서는 연구자의 연구활동을 조정하고, 연구 결과를 집약할 수 있는 책임과 권한이 부여된 새로운 거버넌스가 필요하다.

이병헌 광운대 경영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