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마키키街 목조주택의 슬픈 삽화
"조금만 사 와, 돈 써버리면 서울 못가…"
일주일에 한번 장보는 것마저 말리던 李
한국이 잘 되어갈 거라는 양아들의 말에
"그렇게 우리나라 일 쉬운 게 아냐" 씁쓸
1961년 12월 13일 이승만 전 대통령 부부가 하와이에 도착한 양아들 이인수씨(가운데)를 만나 기뻐하고 있다.
1964년 하와이 마우나라니 요양병원에 입원한 이승만 전 대통령과 양자 이인수씨(오른쪽 첫번째) 이승만기념사업회 제공
"마키키 집에 가끔 인사 드리러 가면 프란체스카 여사가 과일가루를 물에 탄 주스와 오레오 쿠키 몇 개를 내주셨어요. 모두 싸구려 과자들이었지요. 그 정도로 두 분의 살림살이가 참 곤궁했어요."
하와이의 '이승만 박사 숭모회' 김창원 회장이 필자에게 회고한 이야기다.
노인성 치매를 앓기 시작했던 이 박사는 마당의 화초에 물을 주고 나무 손질을 하거나 거실에서 걷기 운동을 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때도 이 박사는 반드시 귀국하리라는 집념이 있었다. 그 목표를 위한 노인의 눈물겨운 모습은 하와이의 유배생활 곳곳에 배어 있다.
5달러 하는 이발비를 아껴 여비를 모으기도 했다. 그 바람에 한동안 이 박사의 머리는 보기 싫을 정도로 길어서 프란체스카 여사가 손수 이발을 해주어야 했다. 한적한 주택가를 산책할 때면 이 박사는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반짝이는 쇠붙이가 여비에 도움이 될 것이며, 튼튼한 노끈도 모아두면 돈으로 바꿀 수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 교민들이 가져다준 가구의 빈 서랍 속에는 이런 폐품들이 차곡차곡 채워지고 있었다. 크리스마스를 전후해 적지 않은 방문객이 전해준 카드 봉투 속의 달러들은 프란체스카에 의해 1달러조차 기부자의 이름과 함께 기록되며 생활비로 충당되었다. 프란체스카는 저녁에 이분들에게 감사편지를 쓰는 게 일이었다.
매주 금요일은 프란체스카가 한 주일분의 식품을 사들이는 장보는 날. 하지만 이 박사는 아내에게 한사코 시장엘 가지 말라며 옷자락을 놓아주질 않았다. 프란체스카는 "굶어서야 살 수가 없잖아요"하고 설명하면 "그러면, 조금만 사 와…돈 써버리면 서울 못 가…"라며 겨우 놓아주었다. 그런 날이면 프란체스카는 장을 보고 와서 아주 작은 봉투 하나만 들고 현관으로 들어갔다. 작은 봉투로 이 박사를 안심시킨 다음, 뒷문으로 나머지 물건들을 들여놓곤 했다.
해가 바뀌어 1961년 봄이 왔을 때, 이 박사의 가장 큰 걱정거리는 자신의 후사를 책임질 양자가 없다는 문제였다. 유일한 친아들 봉수를 열 살 때 병으로 잃은 이후 양자의 인연은 한동안 없었다. 그가 대통령이 된 이후 이기붕의 아들 이강석을 양자로 들였지만 1960년 4월 28일, 이강석은 친아버지(이기붕), 친어머니(박마리아) 그리고 동생들을 살해한 후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수평선 너머로 해가 가라앉는 것처럼 이승만도 자신의 생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고 있었다. 그럴수록 자신이 세상을 떠난 후의 뒷일을 맡아줄 양자가 절실했다. 하와이의 이 박사 동지들과 제자들은 누구보다 이 사실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오중정 총영사를 포함한 인사들이 몇 차례 회의를 가지면서 이 문제를 해결할 적임자로 4·19 이후 미국으로 돌아간 이순용 전 체신부 장관(1897~1988)을 찾았다.
그는 미국 유학 시절이던 1942년, 이승만의 추천으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의 특수첩보부대원이 되어 인도와 중국에서 맹활약했으며, 해방 후 미군정청의 방첩대(CIC)에서 백의사와 미군 간 연락업무를 도맡았고, 국군 창설에도 깊이 관여했다. 정부 수립 후에는 체신부 장관, 대한해운공사 사장 등을 역임하며 건국의 기둥이 되었다가 4·19 이후 미국으로 돌아온 상황이었다. 이순용씨가 이 박사의 양자를 구하기 위해 한국으로 다시 입국했을 때는 박정희 소장에 의한 5·16 쿠데타가 진행되고 있던 5월 중순이었다. 자유당 정권의 핵심 각료였던 인물이 쿠데타 진영 한가운데로 불쑥 들어온 셈이어서 감시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고 한다. 하지만 국가 차원의 여러 공작을 체험했던 이순용씨는 불안해하는 군부를 설득해 가며 전주 이씨 종친회를 찾아가 이 박사의 양자를 구하는 데 성공한다.
그가 찾아낸 양자는 경기 양주군 교육감을 지낸 이승용씨의 자제 이인수씨였다. 고려대 경영학과를 마치고 경희대 정치학 석사로 유학 준비를 하던 만 30세의 이인수씨는 이 박사와 같은 양녕대군파에다가 항렬도 이승만 바로 아래의 수(秀)자 항렬이었으며, 영어에도 능통해 프란체스카와의 의사소통에도 지장이 없었다. 불과 2년 전 4·19 당시 고려대 후배들의 데모에 박수를 보낸 이인수씨로서는 얄궂은 운명이 아닐 수 없었다.
그는 여러 이유를 대며 처음엔 고사를 했다. 그러나 전주 이씨 종중에서 "그동안 잘 모셨더라면 어른의 말년이 이렇게 비참하지는 않았을 텐데…마지막으로 같은 혈손들이 도와드릴 의무가 있다"는 말에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의 생부 이승용은 "정말 어려운 자리라 네 삶이 편치만은 않겠지만 열심히 모셔라"며 격려했다.
1961년 12월 13일 낮 12시, 이 박사가 그토록 기다리던 양아들 이인수씨가 호놀룰루 공항에 도착했다. 최백렬씨와 오중정씨 등 교포 10여명이 이인수씨에게 꽃다발을 걸어주었다. 일행이 차를 타고 30여분을 달려 도착한 곳은 마키키가 언덕길의 하얀 목조주택. 검은 양복에 선글라스를 쓴 이 박사와 양장 차림의 프란체스카는 테라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마당을 들어서는 이인수씨를 바라보던 노인 이승만은 기쁨에 겨워 손을 흔들었다. 나무 층계를 올라선 이인수씨는 한국식 큰절을 올렸다. 이승만으로서는 분명 감격의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양아들 손을 잡아끌 듯 거실의 소파로 가 앉은 이승만이 처음 물어 본 질문은 "지금 우리나라가 어떻게 되어 가지?"였다.
"지금 많은 사람들이 나라를 위해 열심히 일하고 있으니 잘 되어 갈 겁니다.
염려 마십시오."
이인수씨가 조심스레 답했다.
"그런가? 나라가 잘 되어 간다면 그것은 참 좋은 일이다. 그런데 너는 남이 잘 된다, 잘 된다 하는 소리 아예 믿지 말거라. 내가…내가…이렇게 절단이 난걸…그렇게 우리나라 일이 쉬운 게 아니야…."
"그렇게 우리나라 일이 쉬운 게 아니야"라는 건국 대통령의 이 한마디는 그의 뒤를 이었던 12명의 대통령들도 수긍할 수밖에 없는 명언일 것이다. <계속>
이동욱 전 KBS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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