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세일즈맨의 죽음'. 쇼앤텔플레이, T2N 미디어 제공
[파이낸셜뉴스]
“우리 시댁 얘긴 줄. 끝나고 남편과 의도치 않게 심도 깊은 이야기 나누게 된 작품”
“보는 내내 아빠 생각에 눈물”
“윌리와 비프. 내 아버지의 삶, 내 남편의 삶, 나의 아들들과 나의 삶이 교차돼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어릴 적 멋모르고 봤던 명작 ‘세일즈맨의 죽음’은 그때는 이해를 못 했지만 나도 아버지가 되고 보니, 또 아버지를 보내고 나니 공연을 보는 동안 마음이 요동쳤다. 극 안에 나도 있고 우리가 있어서 더 눈물이 흐른다.”(이상 온라인 관객 반응)
지난 1월 7일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에서 개막한 연극 ‘세일즈맨의 죽음’이 77년이라는 시공간을 뛰어넘어 오늘날 관객의 심금을 울리고 있다.
현대 희곡의 거장 아서 밀러(1915~2005) 대표작인 이 작품은 1949년 브로드웨이에서 초연된 후 전 세계적으로 가장 널리 공연되고 사랑받는 미국의 대표적인 희곡 중 하나다.
원작은 1930년대 대공황의 그림자가 드리우면서 실직 위기에 놓인 30년차 세일즈맨 윌리 로먼이 자신의 기대에 못 미친 두 아들과 갈등을 겪는 한편 환상과 현실을 오가며 자신의 삶을 반추, 결국은 무너지는 과정을 그린다.
제작사 쇼앤텔플레이와 T2N미디어가 지난 2023년 이어 재연한 이번 무대는 연극 ‘알리바이 연대기’로 동아연극상·대한민국연극대상을 수상한 김재엽 연출이 메가폰을 잡았다.
원작에 충실한 버전으로 완성해 러닝타임이 장장 3시간에 달한다. 그런데도 뜨거운 입소문에 힘입어 오는 3월 3일까지 이어지는 공연의 주요 좌석이 이미 동난 상태다.
연기 경력 5060년차 박근형, 손숙, 손병호, 예수정 등 주역들이 작품의 완성도를 높인 주역. 우리 부모세대와 닮은 소시민 부부를 연기하며 작품에 대한 몰입도를 높였다. 흔히 고전은 영원하다고 하는데, 그야말로 보편성과 동시대성을 장착한 수작이다.
세일즈맨의 죽음 김재엽 연출
러닝타임 3시간 ‘순삭’..“원작에 충실, 번역에 공들여”
김재엽 연출은 그동안 자신이 직접 쓴 사실적이거나 실험적인 작품을 연출하다 이번에 처음으로 현대 고전에 도전했다. 그는 “미국 대공황이라는 원작의 경제적 상황을 굳이 염두에 두지 않아도 현대적 보편성을 갖춘 작품이라 끌렸다”며 “존재감이 큰 배우들을 어떻게 조화롭게 극장 안에서 적합하게 구성할지를 중점적으로 고민했다”고 말했다.
기본적으론 원작에 충실했다. “러닝 타임에 대한 부담을 고려해 대본을 함부로 줄이지 않았다”며 “작가가 쓴 인물의 과거나 내적 정보가 다 드러나도록 했다”고 부연했다.
번역에도 공들였다. 영어로 된 원작 희곡에 1976년 국내 초판 된 번역본, 민음사에서 나온 ‘세일즈맨의 죽음’까지 세 권을 비교하면서 “의미를 훼손하지 않는 선에서 일상어에 가깝게 번역했다”며 “지명이나 역사적 사건은 그대로 쓰는 가운데, 구어체와 배우들이 사용하는 일상어에 가깝게 번역해 번역극처럼 느껴지지 않게 했다”고 말했다.
일례로 로먼의 대사 중 ‘내가 사는 것보다 죽는 게 더 가치있는 인생이 됐어’라고 하자 친구가 ‘어떤 인생도 사는 것보다 죽는 게 더 가치있는 인생은 없어, 내 말 듣고 있어?’라고 응수하는데 배우에 따라 이 대사를 ‘개똥밭에 굴려도 이승이 났다’로 처리했다. 이는 배우들의 언어적 개성을 살리려는 의도였다.
연극은 2박 3일간 벌어진 일을 다루나 한 남자의 일생을 돌아보게 한다.
김 연출은 “큰아들 비프가 부모 집을 방문하고, 다음날 그가 아버지의 기대 속에 과거 알던 지인께 사업 제안에 나섰다가 실패한 그날 밤 벌어진 일”이라며 “다음날 장례식까지 2박 3일”이라고 짚었다.
“현란하게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원작엔 한 남자의 한평생 시간이 다 녹아있다. 우리는 공간이 제한된 연극 무대라 이런 시간이 어떻게 자연스럽게 이어지게 할지가 고민이었다"고 부연했다.
공연장이 기존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로 바뀌면서 무대 디자인도 변경했다. 그는 “최대한 객석 가깝게 했다”며 “화단에 실제로 흙을 가져다가 꽃을 심었다. 집 외에 회사나 술집 등은 간판을 무대 아래로 내려서 어떤 공간인지 직관적으로 알게 했다”고 변화를 설명했다.
이번 작품엔 암전이 전혀 없다. 오로지 배우들의 등장과 퇴장 신을 통해 지금이 과거인지 현재인지 또 윌리가 죽은 사람과 대화하는지를 직관적으로 알수 있게 연출했다.
눈치 채지 못했는데, 배우들끼리 한 규칙이 있단다. 그는 “지금 현재 벌어지고 있는 장면을 연기할 때는 반드시 현관문을 통해 들고났다면, 과거 회상 신 등에서 등장하는 인물은 그렇지 않고 바로 등퇴장했다”고 비교했다.
세일즈맨은 왜 비극에 이르렀나?
위대한 영웅의 이야기를 다룬 전통 비극에선 늘 악역이 존재한다. 하지만 현대 고전인 이 작품에는 악역이 없다. 김 연출은 “윌리는 자기 안에 있는 자신과 싸운다”며 “소년이 어른이 되는 과정에 관한 이야기인데, 자본주의 사회가 요구하는 가부장의 역할을 스스로에게 강요한 게 비극적 결말로 이끌었다”고 봤다.
“자본주의 사회는 소년에게 성공을 요구한다. 돈을 많이 벌고 결혼도 해야 어른이 된다고 말한다.” 특히 미국은 아메리칸드림을 꿈꾸며 각국에서 온 이민자의 나라다. 아메리칸드림을 이루는 게 가부장제 남성의 존재 이유인 셈이다.
그는 “당시 미국 현대 작가들이 이민 1.5세나 2세대의 아메리칸드림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썼다”며 “로먼이 폴란드 지역에 있는 도시 이름이라는 점에서 그 역시 이민자로 추정된다”고 짚었다.
실제로 작가 아서 밀러는 미국 뉴욕에서 나고 자란 폴란드계 유대인이었으며, 그의 삼촌이 대공황 때 사업 실패로 자살한 가족사가 있다.
김 연출은 “우리나라 IMF 때처럼 대공황 땐 그런 일이 많았다. 당시로선 ‘세일즈맨의 죽음’은 르포문학이라고 할까. 사실성이 강조된 문학 작품이었다”고 부연했다.
윌리의 죽음은 여러 의미로 다가온다. 무엇이든 다 사고 팔수 있는 자본주의 사회의 비인간적 속성과 남성의 존재이유가 된 효용성 그리고 눈물겨운 부성애가 혼재돼 있다.
김 연출은 “마지막 자신의 죽음마저도 남은 자에게 효용이 있기를 바란다는 점에서 어리석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또 안쓰럽다”며 "자본주의 사회가 요구하는 남성성에 대한 로먼의 집착이 불행을 자초했다”고 분석했다.
“로먼은 세일즈맨이라는 직업을 필요 이상으로 높게 평가한다. 마치 금광을 캔 사람처럼 아메리칸드림을 창조한 사람이라는 환상을 갖고 있다. 효용성으로만 따지면, 친구가 자기 회사에 오면 주급을 더 주겠다고 했는데도 그는 거절한다. 남성성에 갇혀 있다”고 꼬집었다.
아들을 자신 분신처럼 여기는 아버지...또다른 비극
이 작품의 또다른 관람 포인트는 자신의 기대에 어긋난 두 아들과의 갈등이다. 특히 비프가 핏대를 올리며 아버지께 자신은 어떤 사람이며 어떤 삶을 원하는지 설명해도 로먼은 이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연극 '세일즈맨의 죽음'. 쇼앤텔플레이, T2N 미디어 제공
비프는 자연을 동경하며 노마드적인 삶을 추구한다. 어떻게 보면 로먼 역시 이러한 삶의 방식이 적성에 맞는 남자였다. 하지만 사회가 요구하는 남자가 된 아버지와 달리 아들은 순응하지 않는다. 자본주의에선 도시를 떠나면 ‘루저’ 취급받는데 말이다. 비프는 허허실실하는 동생 해피와 달리 이러한 가치관에 저항한다.
김 연출은 “젊은 관객들이 그 장면을 두고 답답해하며 ‘저게 리얼리티’라는 반응을 보이더라”며 “한국사회도 코리안 드림을 완성시키려는 마음이 강하다. 성공한 부모일수록 자기 세계관에 대한 과도한 확신이 있다. 실패한 부모는 내가 이런 걸 안했더니 아쉽더라며 (자식 성공에) 집착하며 조언한다. 그런데 가족의 평화를 위해선 부모세대의 감각과 자식세대의 감각이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고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짚었다.
“아버지가 아들을 자기 분신처럼 만들고자 하니 부자간 소통이 안된다. 아들은 자기 가치관에 맞게 살게 놔둬야 한다. 부모 자식간의 이상적 관계는 자식이 부모로부터 정신적, 물리적으로 독립하고 서로 가끔 만나는 사이가 좋다고 본다.”
“젠더 감수성은 올드 한 작품”
“아버지가 훌륭한 분이라고는 하지 않겠다. 윌리 로먼은 엄청나게 돈을 번 적도 없어. 신문에 이름이 실린 적도 없지.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인품을 가진 것도 아니야. 그렇지만 그이는 한 인간이야. 그리고 무언가 무서운 일이 그에게 일어나고 있어. 그러니 관심을 기울여 주어야 해. 늙은 개처럼 무덤 속으로 굴러떨어지는 일이 있어서는 안 돼. 이런 사람에게도 관심이, 관심이 필요하다고.”
극중 로먼의 아내 린다가 두 아들에게 하는 호소다. 린다는 자신의 노쇠한 남편을 위하지만, 정작 로먼은 그런 아내를 존중하지 않는다. 늘 그의 말을 끊기 일쑤다. '아내란 남편에게 복종하는 게 당연하다'는 논리 속에 산 기성세대 부모의 모습과 닮아있다.
김 연출은 “젊은 여성 관객들이 린다를 대하는 로먼의 태도에 경악을 금치 못하더라”며 “젠더 감수성 측면에서 올드한 작품”이라고 공감했다. 그러면서 로먼의 행동 이면의 심리를 짚었다.
“로먼의 과거 회상 신을 보면 린다는 늘 자신에게 얼마나 벌었는지 묻고 얼마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사람이다. 죽은 형이 자신에게 알래스카에 가자고 했을 때 못 가게 말린 사람도 아내다.” 누구나 가보지 못한 길에 대한 미련이 있으니, 윌리에게 아내는 자신의 앞길을 막은, 부양 책임을 상기시켜주는 존재였을지 모른다.
“세일즈맨은 또 거절을 많이 당하는 직업이다. 집에선 그런 경험을 당하고 싶지 않았을 테니 그런 심리가 아내의 말을 듣지 않은 형태로 나타났을 것”이라고 해석했다.
마지막 거대한 죽음 앞에 모종의 깨달음을 얻은 두 아들은 각자 새 삶을 다짐한다. 각자의 선택은 다르다.
김 연출은 비프의 선택에 주목하며 비프가 한 ‘나는 나를 알아’를 가장 좋아하는 대사로 꼽았다. “나를 아는 게 참 어려운 것 같다. 나를 잘 몰라서 사람들이 불행해지는 게 아닐까. 나를 모르면, 세상의 욕망에 맞춰 자기가 아닌 모습으로 살게 된다.”
그는 남편의 장례식에서 "오늘 주택 할부금을 다 갚았다"는 린다의 대사도 꼽았다. "오늘 말이에요. 그런데 이제 집에는 아무도 없어요.”
‘세일즈맨의 죽음’에서 죽음은 어떤 의미일까? 그는 “우리가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을 인지하면 다르게 살지 않을까”라고 답했다.
“죽음에 대해 이해하면, 덜 욕망하고, 덜 미워하고, 덜 싸울 수 있지 않을까. 로먼은 무언가를 위해 자신의 목숨마저 판다. 그 순간 살짝 환희에 찬 음악이 나온다.
그런데 그 음악은 곧 장례식과 함께 레퀴엠으로 바뀐다.”
나이가 들수록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 중의 하나가 평범한 삶이라는 걸 깨닫는다. 그 평범한 삶을 성실히 수행한 로먼의 잘못된 선택이나 여러 인간적 실수가 안타까우면서도 미워할 수 없는 이유는 그가 최선을 다해 그 평범한 삶을 살기 위해 고군분투했기 때문일 것이다.
"당신은 방금 왕이 걸어 나가시는 걸 본 거요. 고난을 겪는 훌륭한 왕이죠. 열심히 일했지만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왕이요. 무슨 말인지 알아요? 멋지고 믿음직한 아버지였어요. 항상 자식들만 생각하고."
연극 '세일즈맨의 죽음'. 쇼앤텔플레이, T2N 미디어 제공
jashin@fnnews.com 신진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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