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성호 경희대 정치외교학과 명예교수
트럼프가 이끄는 보수 포퓰리즘이 미국 민주주의를 위기에 빠뜨리고 있다. 국민의힘, 자유통일당 등 윤석열 대통령 옹호세력이 불 피운 보수 포퓰리즘도 한국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있다. 두 경우 중 우리의 상황이 더 심각하다. 미국 보수 포퓰리즘은 20세기 중반 이래 한동안 기세를 올리다 약해지는 역사 사이클을 반복, 이번에도 그 메커니즘이 작동돼 얼마 후엔 가라앉을 걸로 예상된다. 반면 한국에선 좌파의 전유물이던 포퓰리즘이 처음으로 보수로 확산한 거라 과연 극단적 분위기를 순화할 메커니즘이 생길지 앞날이 걱정스럽다.
포퓰리즘을 직역하면 인민주의, 민중주의, 대중주의, 대중영합주의 등이 가능하겠으나 실제 용례는 부정적 뉘앙스로 차 있다. 첫째, 기득권층을 적으로 상정하고 둘째, 소시민 계층의 상대적 상실감을 기득권층에 대한 집단적 분노로 북돋워 셋째, 이 분노를 종종 제도 틀 밖에서 터뜨려(심지어 법질서를 무시하기도 하며) 권력을 쟁취·유지하려는 정치 양식을 뜻한다. 포퓰리즘은 상황에 따라 진보나 보수 진영과 합해져 정치적 파괴력을 발휘한다. 근래엔 세계 곳곳에서 주로 우파 정치인들이 포퓰리즘을 빌려 정치 갈등을 극대화하고 체제 위기감을 고조시키면서 극단주의적 권력게임을 하고 있다.
트럼프가 대표적이다. 그는 진보·고학력층·국제주의자 등을 미국을 좀먹는 적으로 상정하고 중산층 이하 소시민의 상대적 상실감과 막연한 불안감을 이 적에 대한 분노로 배출시켜 보수 진영의 대권 탈환을 이끌었다. 자기가 패했던 2020년 선거 결과에 대한 불복, 의사당 폭동 응원, 음모론, 가짜 뉴스 등 법질서를 무시하는 행태도 서슴지 않았다. 포퓰리즘에 취한 트럼프 진영은 오늘날 집권 초의 기세를 몰아 각종 과격한 조치로 진보적 의제는 물론 민주주의 정신 자체를 위협하고 있다.
그래도 미국에선 보수 포퓰리즘이 너무 극단화돼 체제를 위기에 빠뜨리는 걸 막아주는 교정·순화 메커니즘이 역사적으로 작동해 왔다. 처음엔 단합했던 정통 보수주의자들과 포퓰리즘 세력 간에 점차 균열이 커지고, 사회 갈등과 위기감이 고조되며 진보는 물론 중도 유권자들이 반발해 등을 돌리는 양상이 반복됐다. 매카시의 반공 선풍, 월리스의 무소속 돌풍, 닉슨의 중산층 공략, 레이건의 보수 '혁명', 깅그리치·부시(아들)의 강경 보수 재건, 티파티 운동의 사회문화적 도전, 트럼프 1기의 격변 등을 보자. 매번 보수 포퓰리즘이 한동안 힘을 내다가 보수주의·포퓰리즘 내분과 진보 및 중도 유권자의 정치적 반발로 약해지는 부침(浮沈)의 사이클이 이어졌다. 보수 포퓰리즘이 약해진 때엔 온건 중도 성향의 민주당 정치인이 대권을 차지했다. 힘의 오만을 과시하고 있는 트럼프 2기도 결국 이 역사 사이클에서 벗어나기 힘들 것이다. 당장 2년 후 중간선거에서 그 전조가 나타날 걸로 전망된다.
미국과 달리 우리나라는 앞날을 내다보기 어렵다. 탄핵정국에 급조된 보수 포퓰리즘 연합은 진보 진영과 의회를 기득권화된 적으로 상정하고, 급변하는 시대에 상대적 상실감을 느끼는 중산층과 청년 남성층을 자극하며, 법질서마저 무시한 채 제도 밖의 시위를 통해 권좌에 매달리고 있다. 보수 포퓰리즘의 이런 극단적 모습은 사회의 양극적 갈등을 악화시키고 체제 위기감마저 고조시키고 있다. 정치권의 전면전은 국민까지 내전으로 몰아가는 듯한 느낌이 든다. 과연 미국에서처럼 보수 포퓰리즘 진영의 내분과 온건 중도층의 반발이 순화 메커니즘으로 작용할 수 있을까? 역사적 선례가 없는 만큼 예상하기 힘들다.
결국엔 우리의 정통 보수주의자들과 중도층의 각성과 의지에 달렸다. 보수주의가 포퓰리즘에 물들어 극단화되지 않도록 온건 보수주의의 궤(軌)를 지켜야 한다. 양극적 이념에 나라가 찢기지 않도록 중도·중용의 가치를 살려야 한다.
임성호 경희대 정치외교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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