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네시아의 아리산과 판차실라
신뢰 바탕으로 40~50명 그룹 이뤄
건국 원칙 '판차실라'와도 이어져
신앙·민주주의·공평·정의 등 상징
인도네시아 수라바야의 한 공원에 모인 사람들이 아리산(일종의 계모임)을 하고 있다. 아래 사진은 인도네시아 건국 5대 원칙을 상징하는 판차실라. 인도네시아 상징의 새 가루다를 배경으로 가운데 있는 별은 전능자에 대한 신앙, 아래의 체인은 민주주의, 오른쪽 위의 나무는 하나의 인도네시아, 왼쪽 위의 뿔 달린 소머리는 인권의 공평, 왼쪽 밑의 벼와 목화는 정의와 복지를 의미한다. 전경수 교수 제공
30년 전 인도네시아의 수라바야에 있는 한국 기업을 견학하는 길에 공장의 창고책임자인 하디씨(당시 44세)의 집을 방문했다. 자녀 셋과 함께 거주하는 방 3개로 구성된 허름한 집이다. 새로 생긴 공단의 보세구역으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한 가난한 동네의 가옥이다.
7~8채의 가옥이 둥그런 큰 마당(꺼분) 하나와 공동변소가 있는 연못을 둘러쌌다. 연못도 마당의 일부다. 마당 한편으로 웅덩이 위에 대나무로 촘촘히 엮은 움막 같은 변소도 있다. 이를 '좀베란'(구정물 통이라는 뜻)이라고 부른다. 이 웅덩이에서 공동으로 메기를 키운다. 각 가정에서 나오는 구정물과 대소변은 메기의 먹이가 되고, 메기들이 충분히 성장하면 동네사람들이 돌아가면서 잡아먹는다. 베트남 메콩델타의 '캑산노이'와 똑같은 모양이다. 물이 흔한 곳에서 리사이클링 시스템을 활성화해 폐수와 쓰레기가 발생하지 않는 생태학적 시스템이다. 사람 사는 동네를 구성하는 기본조건이 마당과 연못이다. 손님이 온 것을 본 이웃 노인이 건너편에 열린 두리안(본래 명칭은 두리안 브사르) 열매를 대접하기 위해 작대기를 들고 나온다. 바틱의 세밀함이 이웃 간의 관심과 관계에도 드러나는 것 같다.
'삼블'(고추와 액젓을 버무린 것), '사율 앗씀'(멀린조 나무의 열매와 잎사귀를 끓이면서 옥수수를 넣어서 삶은 것), '떠리'(멸치를 고추와 함께 볶은 것), '따후'(두부 구운 것), '뗌베이'(콩을 썰어서 납작하게 만들어서 구운 것), '이깐'(생선)과 '아얌'(닭)을 구운 것, 그리고 '나시'(밥)를 방바닥 돗자리 위에 놓고 점심을 먹었다. 다섯 손가락을 부지런히 움직여 버무려서 입안으로 운반하는 동작을 반복했다.
하디의 집은 1993년에 누님의 도움으로 구입한 것인데 미화로 3500달러를 지불했다. 3년 만에 7000달러로 뛰었단다. 보건소에 근무하는 누님으로부터 빌린 목돈은 조금씩 모아서 갚아나가는 중이다. 마당 앞에 목재로 쓸 만한 나무토막들이 수북하게 쌓여 있는데, 그것들은 회사에 자재가 들어올 때 포장용으로 사용되었던 것을 가지고 나왔다. 공장이 있는 곳은 보세구역이기 때문에 이 지역 내에 들어온 물건들을 가지고 나가지 못하도록 입구에서 철저한 경비를 서고 있는데, 회사의 허락을 얻어서 들고 나온 것이다. 성취 동기가 강한 면을 본다.
공장의 차량을 운전하는 우딘(32)은 월 200달러 정도를 벌어서 단칸방의 월세로 40달러를 낸다. 그의 처가 '아리산'(arisan·계와 동일한 방식)을 한다. 한 개의 아리산 조직은 40명 정도다. 동네 부인네들을 중심으로 하며, 한 번 모일 때마다 미화로 약 5달러씩 낸다. 시골동네에서는 한 그룹의 아리산 인원수가 200~300명인 경우도 있는데 도시에서는 보통 40~50명 정도로 구성한다. 한 달에 한꺼번에 2~3명이 계금을 수령한다. 계금을 꼭 타고 싶은 경우에 타지 못하게 되면 곗돈을 탄 사람으로부터 20~30%를 제하고 곗돈을 꾸어서 쓰는 경우도 있다.
공장에서도 공정의 라인(50명)별로 아리산을 한다. 일인당 2000루피아씩 갹출하며, 전체를 관리하는 계주가 있다. '집 장만'이라는 특별한 명칭을 내세운 아리산도 있다. 인플레가 심하기 때문에 돈의 가치에 대한 걱정도 있지만, 아리산을 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주고, 받고, 되갚는' 사이클로 함께 살아가기의 공동체 지향에 있다고 생각된다. 그만큼 공동체 의식과 성취 동기가 강한 심성의 사람들이라는 증거다.
동네 공원에서 아리산을 하는 장면을 보았다. 약 160명의 성장한 부인네들이 커다란 파빌리온에 둥그렇게 둘러앉아서 각자 준비해온 음식을 펼쳐 놓고, 서로의 음식을 맛보면서 담소를 나눈다. 아이들도 따라왔기 때문에 족히 300명은 넘게 모여 시끌벅적한 상황이다. 주최 측에서는 핸드마이크로 설명을 한다. 한 달에 5달러에 해당되는 루피아를 개인별로 갹출해 진행하는 아리산인데, 한 달에 한 번씩 만난다. 한 바퀴 돌아가려면 최소한도 50개월이 지나야 한다.
공동체라는 형식의 양적 규모뿐만 아니라 시간적 지속성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지 않을 수가 없다. 아리산의 우산 밑에 있으면 구성원들은 언젠가는 반드시 내 차례가 돌아온다는 생각으로 한통속이 되는 것 같다. 서로 다른 종류의 사람들과 서로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더불어 사는' 방식을 터득한 사람들의 생활양식이다. 나와 다른 종류의 사람들과 어울려서 '더불어 살기' 위해서는 상대방을 바라보고 상대방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생각할 여유가 필요하다. 이 과정에 숙달된 사람들이 타협을 모색하는 여유를 마련한다.
산스크리트어의 조합인 판차실라(pancasila) 이념의 원리도 동네에서 이뤄지는 아리산 개념의 연장선상이라는 생각이 든다. 신생국 인도네시아의 판차실라는 1945년 8월 18일에 시작됐다. '판차'는 다섯을 의미하고 '실라'는 원리라는 뜻이다. 힌두 신화의 신조(神鳥)인 가루다의 가슴에 그려진 다섯가지 그림들의 상징은 다음과 같다. 가운데의 별은 전능자에 대한 신앙을 의미하며, 오른쪽 아래의 체인은 민주주의, 오른쪽 위의 나무는 하나의 인도네시아, 왼쪽 위의 뿔 달린 소머리는 인권의 공평, 왼쪽 밑의 벼와 목화는 정의와 복지를 의미한다. 아이들이 고등학교를 다닐 때까지 학교에서 가르치는 가장 중요한 과목이 판차실라다. 이 과목을 10점 만점에 6점 미만을 받으면 낙제다.
인도네시아 국기는 붉은색과 흰색이 가로로 반반으로 나뉘었다. 위의 붉은 절반은 용기, 아래의 흰 절반은 신성을 상징한다. 붉은 것은 사람의 피로부터 나온 아이디어이고, 아래의 흰 것은 사람의 뼈로부터 나온 개념이란다. 국기가 인도네시아를 구성하는 사람들의 피와 뼈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문화다원주의를 바탕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뼈와 피로 만들어낸 통합정신의 판차실라가 인도네시아의 힘이다. 수마트라, 술라웨시, 할마헤라, 보르네오, 발리, 순다열도와 파푸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신앙과 일상언어가 다른 6000개의 섬에 2억8000만명이 한 울타리로 살아가는 그곳에 요즈음은 '사야판차실라'(SayaPancasila·내가 판차실라다)라는 해시태그도 유행한다. 인류학적 사상의 출발점인 원초심성론(elementargedanken)을 제안했던 독일 민족학자 아돌프 바스티안이 인도네시아를 주목한 것은 필연이었다.
전경수 서울대 인류학과 명예교수
jsm64@fnnews.com 정순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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