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분의 죽음, 당신 책임 아닙니다”
‘자책에서 자유로’ 자살 유가족을 위한 치유의 길 안내서
[파이낸셜뉴스]‘자살’이라는 말은 우리 사회에서 사용하기 꺼리는 단어다. 사회적 편견과 낙인의 두려움 속에서 자살 유가족은 자신의 슬픔을 드러내는 것조차 숨겨야 한다. 이런 현실 속에서 생명존중시민회의 임삼진 상임이사가 자살 유가족이 겪는 고통과 상실, 그리고 그 회복의 길을 안내하는 '자살 유가족 치유핸드북'(KSS, 208쪽, 20,000원)을 펴냈다.
이 책은 지난해 출간된 전자책 '죄책감에서 벗어나 치유로'를 대폭 보완한 것으로, 자살로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이들이 겪는 복합적인 고통 - 죄책감, 분노, 낙인, 사회적 고립-에서 벗어나 회복과 치유의 여정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그분의 고통은 끝났습니다. 이제 당신의 치유를 시작할 시간입니다.”
임삼진 박사는 자살로 사랑하는 이를 잃은 유가족들이 흔히 겪는 죄책감은 ‘벗어나야 할 잘못된 생각’이라고 단언한다. 치유와 회복는 고인이 유가족들에게 오히려 가장 바라는 것이기도 하다. 미국의 '자살유족 핸드북'을 인용하며 자살은 유가족이 막지 못한 개인적 실패 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니며, 사회·경제적 위기를 비롯하여 고인을 둘러싼 다양한 요인이 결합해서 일어난 ‘내몰린 죽음’이라는 인식으로 전환을 촉구한다.
이 책은 자살 유가족 권리장전에서 가장 핵심적인 권리인 ‘살 권리’를 상기시키며, 유가족들이 회복을 위해 선택할 수 있는 구체적 방법들을 제시한다.
예컨대 △지원그룹을 찾아 도움을 받을 것 △애도를 서두르지 말 것 △자신에게 최대한 너그러워질 것 △고인과의 ‘소통’을 지속할 것 △다른 유족의 이야기를 들어볼 것 △신앙 공동체나 지역사회의 손을 잡을 것 등이 그것이다. 특히 이 책에서는 30페이지에 달하는 ‘애도의 과정 밟기’를 통해 자살 유가족이 어떻게 애도의 과정을 밟아야 하는지를 상세하게 다룬다.
또한 무엇보다 유가족이 ‘말하기’를 시작함으로써 치유가 시작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감정을 드러내고, 사회적 침묵을 깨뜨리는 일이야말로 진정한 회복의 출발선이라는 것이다.
이 책은 자살 유가족의 사회적 목소리조차 잘 들리지 않는 우리나라와 달리, 일본과 미국 등지에서는 유가족들의 ‘공적 발언’과 활동이 활발히 전개되고 있다고 소개한다.
일본에서는 “자살을 말할 수 있는 죽음으로”라는 구호 아래 민관이 협력해 유가족 지원 체계를 정비했고, 미국에서는 하루에 10만 명 이상이 방문하는 사이버 추모관과 같은 플랫폼이 조성되었다. 유가족의 추모글을 모은 책 '자살자의 얼굴', 유가족이 패널로 나서서 목소리를 내는 프로그램 등도 회복과 치유에 기여해 왔다. 이런 사례들은 자살 유가족이 더 이상 위축될 필요가 없다는 것, 보다 당당해져야 한다는 메시지로 이어진다.
임 박사는 자살이라는 표현에 대해 “사회적 원인으로 내몰린 죽음을 ‘극단적 선택’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심각한 왜곡”이라고 지적하며, “자살이라는 말을 숨기기보다는 고인을 폄하하지 않고, 유가족의 목소리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 건강한 사회로 나아가는 첫걸음”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언어의 회피는 자살 유가족들에게 더 큰 침묵과 고립을 강요하는 도구가 되기도 한다. 그 결과 우리 사회에서는 매년 1만 명이 넘는 이들이 자살로 세상을 떠나지만, 그 뒤에 남겨진 유가족들은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못한다. ‘자살’이라는 단어를 더 이상 외면하지 말고, 제대로 된 이해와 책임을 사회 전체가 공유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자살 유가족 치유핸드북은 단지 유가족 개인의 치유를 넘어, 우리 사회 전체가 자살 유가족을 포용하는 방향으로 변화해야 함을 역설한다. “자살 유가족이 잘못한 게 아닙니다. 사회가 돌보지 못한 책임입니다. 유가족이 짐을 짊어져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
10여 년간 생명운동을 해온 임 박사는 “자살은 많은데 자살 유가족은 보이지 않는 우리 사회에서, 이 책이 유가족들에게 작은 희망의 메시지가 되길 바란다”라고 전했다. 임 박사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당부한다.
“유가족 여러분, 이제 무거운 마음의 짐을 내려놓으십시오. 그리고 기억하세요. ‘그분의 죽음, 당신 책임 아닙니다.’”
courage@fnnews.com 전용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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