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상 기획재정부 2차관
대장장이는 쇠가 달궈졌을 때 두드린다. 농부는 농작물 성장기에 물을 준다. 이미 말라 비틀어진 쭉정이 벼에 물을 줘봤자 알곡이 될 리 없다. 나랏돈도 마찬가지다. 같은 돈이라도 제때, 그리고 제대로 쓰면 값어치가 커진다. 재정의 '가치'는 타이밍에 좌우되기 때문이다. 이번에 정부가 산불·통상·민생 등에 대응하기 위해, 서둘러 12조2000억원 규모의 '필수 추경안'을 마련한 이유다.
추경은 먼저, 대형 산불 등 재난·재해 복구 및 대응 역량을 강화하는 용도로 쓰인다. 이번 영남 산불은 사상자가 83명에 이를 만큼 최악의 규모였다. 4000호에 이르는 주택이 불타거나 쓰러져 수많은 이재민이 삶의 터전을 잃었다.
이에 정부는 신속한 피해복구와 온전한 일상 회복을 위해 재해대책비를 기존 5000억원 수준에서 약 3배 증액하고, 피해지역 인근에 신축 매입 임대주택 1000호를 공급하는 한편 주택 복구를 위한 저리 자금을 지원할 예정이다. 또한 산불 예방·대응 역량 강화를 위해 AI 감시카메라·드론 등 첨단장비를 보강하고, 산불 진화차와 중·대형 산림 헬기 등도 대폭 확충할 계획이다.
다음으로, 통상·AI 경쟁력 강화에도 과감히 투자한다. 미국의 상호관세 부과 90일 유예조치, 미중 관세전쟁 등 대외 여건이 급변하고 있다. 이러한 통상 리스크는 우리 경제에 하방 압력을 키운다.
정부는 이번 추경을 통해 관세 피해·수출 기업의 유동성 경색을 방지하기 위해 정책금융기관을 통해 저리대출·보증·보험 등 특별자금 25조원을 확충한다. 수출 바우처도 기존 약 3000개사에서 8000개사로 늘린다.
AI·반도체 등 첨단전략산업에 대한 투자도 강화한다. AI 학습·연산에 필수적인 고성능 그래픽처리장치(GPU) 1만장을 확보하고, AI 정예팀을 선발해 챗GPT와 같은 세계 선도 거대언어모델(LLM)을 개발하는 데에 필요한 GPU·데이터·최고급 인재 등의 인프라를 지원한다. 또한 AI 분야 유망 기업에 투자하는 AI 혁신펀드도 900억원에서 2000억원까지 2배 이상으로 확대한다.
첨단전략산업 생태계 강화를 위한 지원에도 속도를 낸다. 용인·평택 반도체 클러스터의 전력망 지중화 비용 중 기업 부담분의 70%를 국가가 지원한다. 첨단전략산업 관련 공급망 안정 품목을 생산하는 소재·부품·장비 중소·중견기업이 신규로 입지·설비 등에 투자 시 지급하는 보조금도 최초로 신설한다.
마지막으로, 소상공인·취약계층 등 민생 안정도 뒷받침한다. 내수 회복이 지연되면서 소상공인과 취약계층의 어려움이 가중되고 있다.
정부는 어려운 소상공인의 경영비용 경감을 위해 전기·가스와 같은 공공요금이나 보험료 등에 활용할 수 있는 연 50만원 한도의 '부담경감 크레딧'을 신설할 계획이다. 자금조달이 어려운 중신용 소상공인에게 6개월 무이자 할부가 가능한 1000만원 한도의 신용카드를 발급한다. 아울러 연매출 30억원 이하 사업자의 점포에서 사용한 카드 소비 증가분의 20%를 소비자에게 온누리상품권으로 환급하는 사업도 새로 도입한다. 저소득 청년·대학생, 최저신용자 맞춤형 정책자금 2100억원 추가 공급 등 금융 취약계층의 생활안정 대책도 추경에 포함했다.
이어달리기 경기를 보면 바통을 터치할 때가 가장 위험하다. 그때 속도가 줄거나 순위가 바뀐다. 이번 추경은 정부의 편성, 국회의 심의·통과, 정부의 배정, 일선기관의 집행 등 이어달리기 절차가 감속 없이 착착 바통터치되어야 한다.
바통을 놓치거나 멈춰서기라도 한다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과 기업이 지게 된다. 이재민의 주거불안이 장기화되고, 수출기업은 대외 통상 압력에 대한 적기 대응이 어려워지며, 소상공인의 폐업 증가세도 이어질 수 있다. 지금 당사자들에겐, 매 순간이 골든타임이다.
김윤상 기획재정부 2차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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