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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사이드 아세안'은 아세안과 한국을 잇는 주요 인물들을 조명하는 인터뷰 시리즈입니다. 매주 토요일 급변하는 아세안 현장에서 직접 발로 뛰어 담은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를 통해 아세안 지역의 새로운 흐름과 기회를 조명합니다. 다양한 한-아세안 교류의 주역들과의 대화를 통해 지역을 읽고, 그 시선을 통해 과거를 톺아보고 새로운 미래를 그릴 예정입니다.
응우옌 푸 빈 초대 주한 베트남 대사가 4월 11일 베트남 하노이 모처에서 파이낸셜뉴스 기자와 만나 인터뷰를 하고 있다. 사진=김준석 기자
【하노이(베트남)=김준석 기자】
"정부에서 자동차 공부를 하라고 북한을 보냈는데, 갑자기 언어 전문가가 필요하다고 해서 한국어 공부를 집중적으로 하게 됐죠. 그 땐 전쟁 중이라 많은 젊은 친구들이 전쟁터에서 생사를 걸고 싸우는 상황이라 불평할 수 없었죠. 한국어를 공부한 것에 대한 후회요? 전혀 없습니다. "
지난 9일 베트남 하노이에서 만난 응우옌 푸 빈 초대 주한 베트남 대사의 유창한 한국어 실력에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연스러운 억양에 고급 어휘까지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빈 전 대사의 한국어 실력의 비결을 묻자 빈 전 대사는 한반도·한국어와의 운명적인 인연을 설명했습니다. 빈 전 대사는 "10년 전만 해도 잘 했는데 많이 까먹었다"며 너스레를 떨었지만, 1시간이 넘는 인터뷰 내내 통역이 필요 없을 정도로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빈 전 대사는 1992년부터 1997년까지 한국에 머물면서 양국 관계 발전의 기초를 다졌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재임 기간 동안 빈 전 대사는 양국의 경제과학기술협정, 무역·항공협정을 비롯해 이중과세 방지, 문화교류 확대 및 해양 운수·세관에 관한 협정 체결을 주도한 오늘날 한국-베트남 관계의 산파 역할을 했습니다.
빈 전 대사는 1973~1977년 주북한 베트남 대사관 직원으로 근무했으며, 1992~1997년까지는 주한 베트남 대사를 지내며 남·북한 모두 근무했습니다. 주한 베트남 대사를 마친 후에는 영사국 국장(1997년), 해외교민위원회 부위원장(1998년), 외교부 장관 보좌관(2001년), 외교부 차관(2002년), 주일본 베트남 대사(2008~2011년) 등을 역임했습니다. 베트남 외교부 코리안 스쿨의 '대부'이자 대표적인 동북아통(通)으로 퇴직 후에도 다양한 분야에서 자문을 구하는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2022년 한-베 수교 30주년을 기념에 출범한 한-베 현인그룹의 구성원 중 한 명입니다.
30년 앞서 내다본 한-베트남 관계
응우옌 푸 빈 초대 주한 베트남대사가 1992년 한국과 베트남 수교 행사에서 발언하고 있다. 응우옌 푸 빈 초대 주한 베트남 대사 제공
빈 전 대사는 주한대사로 재임시절
"한국과 베트남 양국은 밀접하게 발전시킬 요인이 많았습니다."라고 소감을 말했다고 합니다. 이후 대사로 부임한 후 본국에 양국 관계에 대해 낙관적인 전망들을 보고했는데 베트남 외교가는 당시 전망에 대해 반신반의했다고 합니다.
빈 전 대사는 베트남과 한국이 당시 비슷한 처지에 놓여 협력의 시너지가 날 수밖에 없었다고 강하게 주장했다고 합니다. 당시 베트남 정부는 대대적으로 개혁·개방 정책인 '도이머이(쇄신)' 정책을 추진 중이었으며, 한국도 대(對)공산권 외교인 노태우 정부의 북방외교가 같은 시기에 이뤄지고 있었기 때문이죠.
빈 전 대사는
"베트남이 필요한 기술, 개발 경험, 자본은 한국이 가지고 있었고, 베트남은 한국이 필요한 인력, 자원을 갖고 있어요. 양국의 이해관계가 아주 부합해 협력 분야가 많아 낙관적으로 전망할 수 밖에 없었어요"라며 당시를 회상했다. 빈 대사는
"
근데 지난 30년이 지나면서 이제는 그 당시 저희가 예측한 것보다 훨씬 더 좋아졌네요"라며 미소를 지었다.
어느 정부가 베트남 관계에 큰 기여를 했냐는 질문에 빈 전 대사는
"여야를 막론하고 수교를 한 노태우 대통령 이후 현재까지 모든 대통령 때마다 양국 관계는 꾸준히 발전했다"고 평가했습니다. 특히, 김대중 전 대통령의 경우 당선 이전에 집으로 초청해 베트남 상황에 대해 물어보면서 도이머이 등 개방 정책이 성공할 걸로 기대한다고 말하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최근 양국 관계 발전을 위해서 한국 정부가 좀 더 능동적으로 움직이고 있다면서 한국 정부의 노력에 감사하다고 말했습니다.
"베트남 사업, 과거엔 대우가 지금은 삼성이 가장 잘해"
도 머이 전 베트남 공산당 서기장을 통역하는 응우옌 푸 빈 전 대사. 응우옌 푸 빈 초대 주한 베트남 대사 제공
빈 전 대사는 초대 대사로서 다양한 정재계 인물을 많이 만났다고 합니다.
빈 전 대사는 "고 이건희 삼성전자 선대회장의 한남동 자택에 초청됐습니다. 베트남의 보반끼엣 전 총리가 황인성 당시 국무총리 초청으로 1993년 방문할 당시 이 선대회장이 미국 일정이 먼저 잡혀 있어 총리와의 면담에 참여하지 못했다고 설명했습니다. 당시 베트남 진출 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것 같습니다"라고 이 선대회장과의 만남을 회상했습니다.
이 선대회장은 이후 베트남이 1986년 시장경제 체제 전환 이후 고도 성장을 이루는 데 성공했다는 근거로 향후 양국 간 더 큰 경제협력이 진행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해 투자 확대를 결정했습니다. 이후 약 10여 년에 걸쳐 삼성전자 뿐만 아니라 삼성디스플레이, 삼성SDI, 삼성전기 등 전자부문 계열사들이 베트남에 진출했으며 현재 베트남 전체 수출의 4분의 1 가까이 차지하는 등 베트남 최대 외국인직접투자(FDI) 기업으로서 현지 경제에 크게 기여하고 있습니다.
빈 전 대사는 "먼저 진출한 대우의 고 김우중 회장은 베트남을 진짜 열심히 공부하셨다"면서 자주 만났다고 전했습니다. 한-베트남 친선협회에서 활발한 활동을 한 LG가(家)와도 자주 교류했다고 말했습니다.
가장 베트남에서 활동을 잘하는 기업은 어디냐는 질문에 빈 전 대사는 망설임 없이
"과거엔 대우, 지금은 삼성"이라고 말했습니다.
"과거는 잊으면 안 되지만, 조건으로 삼으면 안 돼"
주한 베트남 대사 시절 강연회에 참가한 응우옌 푸 빈 전 대사. 응우옌 푸 빈 주한 베트남 대사 제공
빈 전 대사는 초대 대사로서 한국 정재계는 물론 한국 언론, 일반 국민들에게도 많은 관심을 받았다고 합니다. 로터리클럽을 비롯해 조찬 모임에 꾸준히 참여해 베트남에 대해 알리고, 한국에 대해 많이 알아갔다고 합니다. 빈 전 대사는 당시 한국 언론은 물론, 대학 초청 강연을 비롯해 섭외 오는 행사들은 가능한 최대로 나가려고 노력했다고 합니다. 빈 대사는
"조찬 모임은 아침밥도 해결되고 각계 각층 전문가들과 교류할 수 있어, 최대한 기회가 되면 자주 참석하려고 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특히, 전·현직 장성 출신들을 비롯해 한국인들의 베트남 전쟁과 관련된 날카로운 질문들이 이따금씩 들어왔다고 합니다.
많은 언론인들이 베트남의 외교 정책 기조인
'과거는 뒤로하고 미래를 향한다'에 많은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빈 전 대사는 "호치민 주석의 평화와 국제 친선을 중시하는 사상을 계승한 베트남 정부의 일관된 정책"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는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5개국 중 러시아(구 소련)를 제외한 4개국이 모두 과거 베트남과 전쟁을 치렀습니다. 또 대부분의 인접 국가들과도 역시 과거에 비우호적인 관계를 맺었던 경험이 있습니다. 만약 베트남이 과거의 원한을 지우지 않는다면, 스스로 고립시키게 될 것입니다."라고 베트남의 외교 기조를 설명했습니다. 빈 전 대사는 수 차례 과거와 역사에 대한 기억을 강조하기도 했습니다.
빈 전 대사는 베트남 전쟁으로 베트남에 대해 선입견을 갖고 있던 한국 사람들이 변화하는 모습에도 감명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는 친하게 지내는 한국인 들 중 "베트남 전쟁 참전 용사 등 베트남에 대해 적대적이었던 분들이 베트남에 대해 이해하고 심지어 베트남 관련된 서적을 출판하기도 했다"고 말했습니다. 기자에게도 책 이름을 알려주며 "꼭 읽어보세요, 진짜 내용이 좋아요"라고 반짝이는 눈으로 수 차례 강조했습니다.
rejune1112@fnnews.com 김준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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