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준 한국중견기업연합회 상근부회장
"DeepSeek(딥시크) 사용해 보셨나요?" 부드럽지만 단호했다. 눈가엔 여전히 따스한 웃음마저 드리운 채다. 베이징 상무관 시절부터의 오랜 친구지만, 순간 등골이 서늘했다. 중국이라는 거대한 벽이 눈앞에서 하늘로 치솟는 환영이 스쳤다면 과장일까. 중국의 엄격한 관료 양성체계 속에서 옌타이와 위하이를 거쳐 지난시에서 세 번째 부시장을 맡고 있는 그녀의 확신에 찬 태도는, 오늘의 중국을 상징하는 명징한 은유처럼 다가왔다. 우정을 되새기며 중국어로 낭독한 환영사를 챗GPT로 작성했다는 설명에, 양리 부시장의 짧은 대답이 끝 모를 질문으로 이어졌다.
세계는 전면전의 시대로 진입했다. 총과 칼 대신 알고리즘과 반도체가, 조약보다는 플랫폼이 전선을 이끈다. 트럼프의 MAGA가 열어젖힌 무차별적 관세부과와 외교압박, 수출통제는 국제정치의 상수로 자리 잡았다. 사각 링에 오른 미국과 중국의 기술 패권경쟁은 글로벌 자본주의의 판도와 오랜 관례까지 뒤엎을 기세다. 상상하기 어려운 관세율을 꺼내 든 미국의 선제공격이 주춤하는 듯하지만, 확대된 불확실성 아래 참호의 포화는 좀처럼 잦아들지 않고 있다.
중국은 기술주권을 선언하고 실행해 온 유일한 국가다. 미국의 압박에 아랑곳하지 않는 모습에 세계가 짐짓 놀라는 체하지만 실제로는 그럴 만하다는 판단이 만만찮고, 근거는 차고 넘친다. 세계 시장의 절반을 차지하는 중국의 전기차는 이젠 가격이 아닌 높은 품질로 경쟁한다. 태양광, 드론, 배터리, 고속철도, 5G 기지국 수 세계 1위에 인공지능(AI) 논문과 인용 빈도는 이미 지난해 미국을 추월했다. GPT-4급 다국어 성능을 목표로 가파르게 진화 중인 딥시크는 정점에 이른 기술역량의 상징이다.
엄격하지만 효율적인 중국의 메리토크라시가 현상의 배후다. 정치나 이념이 아닌 실용적 가치만을 점검할 때 그 저력은 가히 상상 이상이다. 일관된 정책, 효율적인 실행을 이끄는 안정적인 지도력은 정부 주도의 프로젝트를 꾸준히 효과적으로 성공시켰다. AI 훈련 기반인 데이터 통제와 활용 체계, 기술의 실험실이자 대규모 수요를 흡수하는 무대로서의 거대 내수시장은 첨단기술의 한계를 끊임없이 확장하고 있다. 미국과의 관세협상 맨 앞줄에서 돌아본 중국의 현주소다. 치솟아 오르는 말 그대로 만리장성이다.
대선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유례없는 정치적 혼란과 사회적 갈등을 넘어 통합과 연대의 새로운 비전과 전략을 모색해야 할 때다. 국민국가의 존재 이유와 정당성을 견고히 다지는 한편, 현실적으로 가장 임박한 위기인 경제와 산업의 경쟁력을 갖추기 위한 결단과 실천도 미룰 수 없다. 공동체의 지속가능성을 확보하기 위한 산업 발전의 방향성을 확정하는 작업은 바로 지금이어도 이미 늦을 수 있다.
우리가 가진 것에서 다시 출발해야 한다. 반도체, 조선, 방산 등 핵심 산업부문에서 확보한 세계 최고 수준의 첨단 제조시설은 자랑이자 자산이다. 'K'가 이끄는 다양한 문화상품들은 대륙과 대양을 가로질러 열광을 이끌어내는 소프트파워의 고갱이이다. 고도화된 ICT 인프라와 빠르게 진화하는 플랫폼 생태계, 이미 검증된 수준 높은 공공 위기 대응 및 디지털 행정 체계는 분야를 막론한 수많은 역량 있는 인재들로 빼곡하다.
다시 볼 날을 기약하며 중견기업이 만든 화장품 세트를 건넬 때 양리 부시장은 표정을 무너뜨리며 활짝 웃었다. K코스메틱을 따로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실기하면 이내 절망일 터이지만, 아직 대한민국은 이만큼이다.
우리의 가능성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중요한 것은 방향과 속도다. 위기 때마다 새로운 문을 열어온 값진 경험이 우리에겐 있다. 격변을 돌파해 다시 한번 도약하는 대한민국을 꿈꿔 본다.
이호준 한국중견기업연합회 상근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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