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방코르: 21세기 글로벌 통화 질서를 묻다-5회]
김종승 엑스크립톤 대표 블록체인법학회 부회장
스테이블코인은 디지털 자산 시대를 대표하는 통화 실험이자, 전통 금융과 블록체인을 잇는 핵심 매개체다. 특히 미국 달러 기반 스테이블코인은 송금, 결제, 디파이(DeFi) 등에서 실사용을 빠르게 확장하며, 디지털 결제 인프라의 중심축으로 자리 잡고 있다. 2025년 현재 시가총액은 약 2430억달러로, 이는 미국 M2 통화 공급의 1.1%를 넘는다. USDT(테더)와 USDC(써클) 등 주요 스테이블코인은 달러 예치금과 90일 이내 단기국채(T-Bills)를 준비자산으로 발행되며, 이러한 구조는 확장성과 안정성을 함께 뒷받침한다.
미국 상원에서 논의 중인 지니어스 법안(GENIUS Act)은 스테이블코인을 연준의 통화 관리 체계에 편입하고, 준비자산으로 미국 국채와 달러 표시 안전자산의 보유를 의무화한다. 이는 디지털 결제 수요를 국채 수요로 전환하는 메커니즘으로 작동하며, 안정적 수요는 국채 금리에 하방 압력을 가하고 연방정부의 조달 비용과 재정 운용의 불확실성을 낮추는 데 기여한다.
스테이블코인은 기존 결제망보다 빠르게 작동하며, 동일한 준비금으로 더 많은 거래를 처리해 결제 효율성과 통화 유통 속도를 높인다. 이는 통화 공급을 확대하지 않고도 달러의 순환 속도와 결제 범위를 확장시키는 효과를 낳는다. 그 결과, 글로벌 결제 인프라에서 달러 의존이 구조화되고, 준비자산이 미국 국채에 집중되면서 유동성은 '미국 재정'이라는 저수지에 갇히는 구조가 형성된다. 이러한 강달러 환경은 외화 의존도가 높은 신흥국일수록 환율 불안과 자본 유출에 취약하게 만들며, 글로벌 통화질서의 불균형을 더욱 심화시킨다.
이는 결국 트리핀 딜레마라는 기축통화 체계의 구조적 역설을 반복한다. 미국은 글로벌 유동성 제공자로서 달러를 지속적으로 해외에 공급해야 하며, 그 대가로 경상수지 적자와 제조업 경쟁력의 지속적 약세를 감수해야 한다. 특히 강달러가 장기화되면 수출 경쟁력 하락으로 무역수지에도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 이에 대응해 보호무역이 강화되면, 글로벌 무역 질서는 더욱 불안정해지고 디지털 유동성의 흐름도 위축될 수 있다. 결국 달러 기반 스테이블코인은 기술적으로는 탈중앙화되어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미국 통화정책에 귀속된 중앙집중형 질서를 재현한다.
블록체인이 약속한 탈중앙화는 왜 현실에서는 IMF의 특별인출권(SDR)보다도 더 단일 통화 중심의 구조로 회귀하고 있는가. 스테이블코인이 통화 질서의 대안으로 작동하려면, 자기주권성을 기반으로 기존 통화 권력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어야 한다. 이제 그 실험은 기술의 차원을 넘어, 새로운 질서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
글로벌 통화 체계의 재편은 특정 국가의 정책에 좌우되지 않는 무역 불균형 조정 메커니즘, 다자간 준비자산, 그리고 탈중앙화된 합의 기반 청산 시스템을 핵심 인프라로 포함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 스테이블코인을 '디지털 달러'가 아닌 '디지털 방코르'로 재구성하려는 이 시도야말로, 우리가 다시 상상해야 할 통화 질서의 출발점이다.
김종승 엑스크립톤 대표(블록체인법학회 부회장)
■다음 편에서는 디지털 방코르 모델이 제안하는 글로벌 통화의 구조와 작동 방식, 그리고 탈달러화 시대에 요구되는 분산형 거버넌스 구조를 구체적으로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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