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년 초연 당시 고 김의경 연출가와 인연 소개
'헤다'로 돌아온 이혜영. 국립극단 제공
'헤다'로 돌아온 이혜영. 국립극단 제공
'헤다'로 돌아온 이혜영. 국립극단 제공
[파이낸셜뉴스] 배우 이혜영과 연출 박정희가 다시 연극 ‘헤다 가블러’로 만났다. 2012년 초연 후 13년 만의 재연이다.
‘헤다 가블러’는 근대 연극의 아버지 헨리크 입센이 1890년 발간한 희곡이다. 남편의 성인 ‘테스만’을 거부하고 아버지의 성이자 자신의 성인 ‘가블러’로 채 살아가는 주인공 ‘헤다’를 통해 남성의 부속품이 아닌 독립적인 여성의 주체를 과감히 드러내며 17세기 남성 중심적 사회에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이혜영은 지난 19일 서울 중구 명동예술극장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박정희 연출은 단순한 연출가라기보다 ‘헤쳐모여!’라고 하면 모두가 모일 수 있는 믿음직한 중심축 같은 사람”이라며 “우리가 모여서 부족한 점을 채우는 것을 넘어서 작품을 완전히 새롭게 만들기 위해 애썼고 그 결과에 만족한다”고 말했다.
현재 국립극단 예술감독이기도 한 박 연출은 이혜영에 대해 “프로덕션을 진행하면서 연출가의 상상을 뛰어넘는 배우가 가끔 있는데, 그중 이혜영이 바로 그런 배우"라며 "대사를 다 없애고 연기로만 풀어보자고 하면, 그가 독창적으로 장면을 완성한다. 독보적인 매력과 재능을 지닌 배우라고 생각하고, 이번 공연에서 더욱 성숙해졌음을 느꼈다"고 말했다.
파괴에서 창조로.. 디오니소스 왜?
마지막 장면에서 헤다가 관객과 극중 인물들에게 총구를 겨누는 동작은 깊은 상징성을 담고 있다.
박 연출은 “이 장면의 움직임과 블로킹은 움직임 선생과 배우, 그리고 내가 함께 만들었다"며 "헤다가 총구를 관객뿐 아니라 브라크, 테스만, 태아에게 겨누는 이유는 헤다가 디오니소스, 즉 파괴와 창조의 신을 경험한 인물이라고 해석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파괴를 통해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것으로 봤다"며 "자신에게 총구를 겨누는 것도 죽음으로 다른 세계로 이동하는 과정으로 해석했다”고 부연했다.
"디오니소스는 바커스, 포도주에 대한 탐닉의 신이라고만 알고 있지만 파괴와 창조의 신이다. 근데 창조를 하기 위해선 뭔가를 파괴해야 된다. 시대의 패러다임이 바뀌면서 또 또 다른 패러다임이 생성되고 그렇지 않나. 그래서 대사에도 머리에 포도 넝쿨을 두르고라는 대사가 계속 나온다. 헤다 같은 경우 삶과 그 파괴의 은유가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다."
이혜영은 이날 13년 전 초연 당시 연출가이자 극작가였던 고(故) 김의경과의 인연을 소개하며 "김의경 선생님께서 ‘헤다 가블러를 해보자’고 했을 때, 사실 그 작품에 대해 잘 몰랐다”고 돌이켰다. 그는 “하지만 희곡을 읽으며 세련되면서도 충격적인 선택을 하는 헤다의 모습이 인상 깊었다"며 "선생님은 ‘이혜영 같은 배우가 없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이 작품을 못했다’고 말했고 그 말을 믿고 큰 착각을 하며 시작했다”고 덧붙였다.
이혜영은 1980년대 데뷔 당시부터 이국적 마스크와 고혹적인 분위기, 압도적 카리스마로 존재감을 과시했다. 가블러 캐릭터와 싱크로율이 꽤 높게 다가온다. 이혜영은 이러한 지적에 “헤다와 나를 동일시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그러면서 “연극이 좋은 이유는 매번 관객과 함께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라며 "관객이 있어야 무대가 완성된다”며 연극의 일회성과 관객과의 상호작용을 연극 무대의 매력으로 꼽으며 답변을 일축했다.
"이혜영 같은 배우가 없었기에 못했던 작품, 그 말 믿었다"
이번 연극은 1970년대로 배경을 옮기고 헤다의 캐릭터 해석에도 변화를 줬다. 현대적인 상류층 집의 거실처럼 꾸며진 무대에는 사이키델릭한 음악과 조명이 흐른다.
박 연출은 "히피즘이 성행했던 1970년대 중반으로 배경을 설정했다"며 "무대 미장센보다 배우들의 관계를 중심으로 밀도 있고 함축적으로 인물들 간의 관계를 그리려고 노력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초연 때는 헤다를 신이 되려는 여성으로 해석해 이혜영의 카리스마가 훨씬 더 있었겠지만 이번에는 인간적으로 접근했다"고 비교했다.
박 연출은 “헤다는 시대를 앞서간 인물”이라며 “그만큼 벽에 부딪혀 무너진 여자이기도 하다. 그 아이러니가 지금 이 시대에도 울림이 있다”고 봤다.
국립극단 연극 '헤다 가블러' 배우 이혜영(왼쪽)과 연출 박정희가 19일 서울 중구 명동예술극장에서 기자간담회를 하고 있다. 뉴시스
국립극단 연극 '헤다 가블러' 배우 이혜영(왼쪽)과 연출 박정희가 19일 서울 중구 명동예술극장에서 기자간담회를 하고 있다. 뉴시스
“복잡다단한 현대 사회에서도 21세기판 헤다들은 존재한다. 돈, 명예, 권력 등 사회 구조가 수직적으로 제안하는 가치들을 차지하는데 진절머리가 난 이들은 과감히 자기파괴를 행하기도 한다.
헤다는 마침내 자신의 육신까지 저버리지만 그의 실존은 끝끝내 살아남는다. 작품을 하면서 보편적 가치라는 말로 개인을 구속하고 강요하는, 구조주의의 최면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작동하고 있음을 느낀다. 그 최면 속에서 자아의 본질을 찾고자 헤매고 있는 오늘날의 헤다들에게 우리는, 그리고 사회는 어떤 손을 내밀 수 있는가를 질문해 본다.”
6월 1일까지 국립극장 명동예술극장.
jashin@fnnews.com 신진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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