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방향성 제시 못한채
맥락 없는 공약만 쏟아내
언론 앞장서 화두 던져야
고려대 미디어대학 교수
국민의 헌법과 법률 지식 수준이 크게 높아졌다. 소위 호텔경제학과 케인스 승수효과가 무엇인지도 알게 됐다. 그러나 고비용 대통령 선거의 목적이 국민의 법과 경제 상식의 계몽에 있지는 않다. 계엄과 탄핵의 책임 소재, 후보자의 형사책임에 대한 방탄 논쟁, 입법독재와 사법권 침해, 민생과 경제 안정을 위한다는 명목의 달콤한 유혹들, 허위사실과 무고의 난무 등이 대선 종반전의 전경임이 매우 유감이다.
후보자 누구도 이번 대통령 선거의 '시대정신'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국가의 현재를 냉정하게 조명하고 미래를 성찰적으로 바라보는 선지자적 거대담론은 도외시한 채 눈앞의 표 계산에만 몰두하고 있다. 선거공학은 후보자의 오늘을 위한 것이고, 정치철학은 국민의 내일을 위한 것이다. 그래도 8년 전 대선에서는 경제양극화 극복, 3년 전 대선에서는 공정이라는 그 나름의 시대정신이 있었다. 그런데 이번 대선에서는 이것이 실종됐다.
대통령 탄핵으로 갑자기 닥친 대선이어서 준비가 부족했다고 변명할지 모른다. 마지막까지 후보경선 과정을 겪은 국민의 힘은 그렇다 치고, 지난 대선 이후 내내 준비해 온 더불어민주당 후보도 예기치 않게 날아온 정치적 호재인 내란의 완전 극복 이외에 눈이 번쩍 띄는 국가비전과 시대정신을 제시하지 못하는 것은 매우 유감이다. 생각이 없는 것이라면 무능의 소치고, 전략상 유보라면 책임의 유기다.
국가 지도자에게는 '줌인(zoom-in)'과 '줌아웃(zoom-out)'의 교차편집 스토리텔링이 필요하다. 절박한 국정과제를 상세하게 줌인한 '클로즈업(close-up)' 샷도 필요하지만, 시대의 흐름을 큰 맥락에서 보여주는 '와이드 설정(wide established)' 샷도 필요하다. 맥락 설정 없는 클로즈업의 연속은 대선 이후 국가의 방향성을 제시하지 못해 또 다른 혼돈을 야기할 것이다. 대선 그 자체의 결과 못지않게 대선 후의 국정 방향이 중요하기에 와이드 설정 샷으로 보여주는 국가비전과 시대정신이 반드시 필요하다.
생각 없이 쏟아내는 클로즈업 샷의 대표적인 사례는 국가 미래를 견인할 대학혁신에 대한 후보자들의 공약이다. 이재명 후보는 서울대 10개를 만들어 지역격차를 해소하겠다고 한다. 김문수 후보는 서울대와 지방 국립대의 학점 교류로 교육 불평등의 문제를 풀어 보겠다고 한다. 그러나 이 공약들이 글로벌 무한경쟁 시대의 대학 경쟁력과 과연 어떻게 연관되며, 여기에서 정부와 대학, 교수의 역할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한 와이드 설정 샷이 없다. 이 정도의 단편적 처방으로 과연 글로벌 과학기술 전쟁 시대의 자생력이 확보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인지, 전체 대학의 약 80%를 차지하는 사립대학의 연구와 교육 기능은 시장경쟁 원리에 맡기겠다는 것인지, 그렇다면 현재의 정부 규제는 어떻게 혁신되어야 하는지 등에 대한 와이드 설정 샷은 전혀 보이지 않아서 답답하다. 저출산·고령화 사회, 기후와 에너지, 연금, 의료, 부동산 문제에 대해서도 앞뒤 맥락을 이해하기 힘든 파편적 공약만 난무하고 있어 또한 매우 유감이다.
대선 후보들이 시대정신을 이야기하지 않는다면 이는 바로 언론의 몫이다. 언론마저 후보자가 쉴 새 없이 던지는 선택적 클로즈업 샷만 쫓아가느라 바빠 시대정신의 제시라는 선지자적 역할을 외면하면 국민에게 희망은 없다. 종착지가 어딘지도 모른 채, 또 다른 5년의 소모적 항해를 시작해야 한다.
현재 정당과 후보자들은 얄팍한 정치 지능(intelligence)에 의존한 전략과 술수의 정쟁 수준에 머물고 있다.
정치 지능을 압도하는 지성(intellectuality)의 정치담론, 즉 시대정신의 언명을 기대하기 힘들다는 것이 우리 정치가 당면한 가장 심각한 문제다. 후보자들이 하지 않는다면, 혹은 그들의 역량 밖의 문제라 기대하기 힘들다면, 언론이 과감히 그 화두를 던져야 한다. 국민이 불확실성의 계곡을 빠져나와 강 건너편 미래를 바라보게 하는 대통령 선거가 되어야 한다.
마동훈 고려대 미디어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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