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운동기념관 개관 기념 공연 ‘미궁의 설계자’]
남영동 대공분실 설계자 김수근 소재 연극
관객들이 실제 장소 이동하며 보는 특별한 공연 현장
관객이동형 장소특정 연극 '미궁의 설계자@남영동' 공연 모습 /사진=연극집단 반 제공(촬영=김명집 작가)
[파이낸셜뉴스] “민주주의의 미래를 여는 민주화운동기념관으로 가실 분은 남영역 1번 출구로 나가시기 바랍니다.”
남영역으로 들어서는 1호선 전철에서 안내방송이 흘러나온다. 플랫폼에 내려 고개를 들면 방음벽 너머 검은색 벽돌 건물이 곧바로 눈에 들어온다. 바로 1970~1980년대 민주화운동 인사들이 끌려와 고문당한 장소로 악명 높은 남영동 대공분실이다.
오는 6월 10일, ‘민주화운동기념관’으로 재탄생을 앞둔 남영동 대공분실이 아주 특별한 연극 무대로 변했다. 남영동 대공분실을 소재로 2023년 초연된 연극 ‘미궁의 설계자’(연극집단 반)가 ‘관객이동형 장소특정 연극’이라는 독특한 방식으로 이곳에서 상연되고 있기 때문이다.
연극으로 경험하는 70분간의 남영동 대공분실 추체험기
공연 시간에 맞춰 대공분실 앞 잔디마당에 모인 관객들은 삼면에서 순서대로 들려오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그 순간, 테니스 코트가 있었던 흔적이 선연히 남아있는 잔디마당에는 3개의 시간대가 뒤섞인다. 대공분실을 설계하라는 압박을 받는 건축가의 조수 양신호(1975년), 대공분실로 끌려와 고문 피해자가 되는 대학생 송경수(1986년), 그리고 지금 현재에 서서 대공분실을 바라보는 해설사 윤미숙과 다큐멘터리 작가 권나은(2025년)의 시간이다.
30여명의 관객들은 이때부터 배우들의 안내에 따라 극장의 객석이 아닌 연극 속 실제 배경인 대공분실로 직접 걸어 들어간다. 성인 남자 5명이 달라붙어도 안 열렸다는 육중한 철문을 실제로 보고, 어디가 정문인지 알 수 없게 하려고 데려간 좁은 뒷문으로 들어가 계단을 오른다. 그렇게 연극의 전개를 따라 조사실이 있는 5층까지 한 층 한 층 올라가면서,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일어난 일들을 추체험한다.
연극으로 재구성된 역사의 현장을 엿보는 심정은 생각보다 무겁다. 눈앞에서 펼쳐지는 배우들의 연기에 ‘남영동 대공분실’이라는 공간의 힘이 더해지자 좀처럼 마음을 가누기가 쉽지 않은 탓이다. 극이 진행되는 약 70여분의 시간 동안, 관객들의 표정에는 착잡함이 가득 어렸고 숨죽여 훌쩍이는 소리도 들렸다. 건물 밖으로 빠져나온 관객들은 설계자의 이름 없이 발주자인 ‘내무부 장관 김치열’의 이름만 새겨진 초석을 보고 깊은 생각에 잠긴다.
6월 10일 개관하는 민주화운동기념관 전경. /사진=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제공
대공분실 앞에서 연극 '미궁의 설계자@남영동' 공연을 지켜보는 관객들의 모습. /사진=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제공(촬영=이관석 작가)
미궁을 만들라고 명령한 자와 설계한 자
초석에 설계자의 이름은 없지만, 대공분실은 한국 건축계의 대부 고(故) 김수근이 설계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1976년 완공된 이 건물에서 김근태 당시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 의장이 고문당했고, 서울대생 박종철이 물고문을 받다 사망했다. 그리고 김수근은 박종철보다 7개월 먼저 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극은 남영동 대공분실을 그리스 신화 속 미노스 왕의 미궁 ‘라비린토스’에 빗대고, 그 설계자인 김수근을 크레타 왕 미노스의 명령에 따라 미궁을 설계한 다이달로스에 비유한다. 그리고 ‘설계자의 의도’와 ‘외부의 압박’ 가능성을 다큐멘터리 작가이자 감독인 나은의 입을 빌어 제시한다. 군부독재 시대였으니 설계과정에서 압박이 있었을 수도 있고, 건축물의 용도를 몰랐을 수도 있다는 반론이다. 실제로 대공분실을 설계한 이가 김수근이라는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을 때 건축계 일각에서 주장한 내용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반론은 극 중에서 대공분실을 해설하는 윤미숙이 토해내는 반박에 금세 힘을 잃는다. “자신이 만든 칼로 사람을 찌를 걸 알았다면 팔지 말았어야 한다, 칼끝을 무디게라도 했어야 한다”고 소리친 미숙은 나은에게 묻는다. 왜 나선형 계단이 1층에서 바로 5층까지 이어지도록 되어있겠냐고. 어린 아이도 머리를 내밀 수 없을 만큼 좁고 긴 창문, 지그재그로 설계돼 문을 열어도 오직 벽만 보이는 조사실을 본 관객들은 미숙의 말에 침통하게 고개를 숙인다. 한 관객은 “건물을 굳이 이렇게까지 만들었어야 했나 싶었다”라는 힘겨운 소감 한 마디를 남겼다.
관객이동형 장소특정 연극 '미궁의 설계자@남영동' 공연 모습 /사진=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제공(촬영=이관석 작가)
안경모 연출은 “피해와 가해, 설계와 흔적, 반성과 책임으로 과거를 현재화하고 현재를 미래의 디딤돌로 만들고자 했다”라며 “시대는 다르지만 남영동 대공분실에 얽힌 사람들의 삶과 선택을 보면서, 예술과 폭력, 인권과 과거사에 대한 반성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았으면 좋겠다”라는 바람을 전했다.
민주화운동기념관으로 다시 태어난 대공분실
민주화운동기념관은 시범 운영을 거쳐 6·10 민주항쟁 38주년인 다음달 10일 정식 개관을 앞두고 있다. 당초 민주회운동기념사업회는 10일 있을 개관식 기념 공연으로 ‘미궁의 설계자’를 올리고자 했으나, 여러 가지 논의 끝에 결과적으로 27일부터 6월 1일까지 6일간 총 9차례 ‘미궁의 설계자@남영동’이라는 제목으로 공연을 진행하게 됐다.
김지은 연극집단 반 대표는 “작품을 만드는 과정에서 사업회 쪽에 많은 도움을 받았고, 초연과 재연을 극장에서 올렸을 때도 (이재오) 이사장님을 비롯해 직원분들이 계속 보러 와주셨다”라며 “개관일이 결정된 뒤 제안이 왔고, 힘든 작업이지만 동시에 의미있다고 생각해 하기로 결정했다”라고 설명했다.
공간적인 제약으로 인해 한 회차당 관람이 가능한 최대 인원은 30명 남짓이다. 인원이 적다 보니 예매는 그야말로 ‘피켓팅’이었다. 김 대표는 “예매를 못했는데 어떻게 볼 수 없겠느냐, 자리를 구할 수 없냐는 연락이 매일 온다”라며 “더 많은 분들께 보여드리고 싶지만 그러지 못해 속상한 마음”이라고 덧붙였다.
실제로 어렵게 표를 구해 공연을 관람한 관객들 중에는 “민주화운동기념관의 상설 프로그램으로 자리 잡아, 기념관을 찾는 사람들이 대공분실의 역사를 연극으로 깊이 이해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라는 바람을 전하는 이들도 있었다.
송경수 역으로 출연한 배우 송현섭도 “울음을 참기가 너무 힘들었다. 연기하면서도 계속 울컥울컥하더라”며 “저도 여기 오기 전까지는 이 공간이 민주화운동기념관이 되었다는 사실을 잘 몰랐는데, 이 연극을 통해 전시보다 조금 더 친숙한 형식으로 많은 분들이 찾아오실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라는 뜻을 전했다.
bng@fnnews.com 김희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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