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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디지털 방코르의 거버넌스 실험-다자주의 기반 글로벌 청산기구

[디지털 방코르: 21세기 글로벌 통화 질서를 묻다-9회]

[기고] 디지털 방코르의 거버넌스 실험-다자주의 기반 글로벌 청산기구
김종승 엑스크립톤 대표 블록체인법학회 부회장
글로벌 유동성이 특정 통화에 집중된 구조는 무역 불균형과 금융 불안정을 심화시켜 왔다. 이는 국제 금융 인프라의 권력 편중이라는 한계를 드러낸다. 2022년 러시아 일부 은행이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 결제망에서 배제된 사건은 이러한 현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 사건은 글로벌 결제망이 중립적이지 않으며, 어느 국가든 경제적 통제를 받을 수 있음을 입증한 사례다. 금융 권력이 편중된 현재의 체제는 지정학 리스크를 세계 경제 전반으로 확산시키며, 다극화된 오늘날의 국제 질서에는 더 이상 부합하지 않는다.

디지털 방코르는 이러한 위기에 대응하는 새로운 글로벌 청산 시스템이다. 특정 국가의 통제를 받지 않는 합의 방식, 스마트 컨트랙트를 통한 자동 집행, 탈중앙화 자율조직(DAO) 기반의 운영 메커니즘이 핵심이다. 청산 시스템은 국가 간 거래에서 발생한 채권·채무를 상계해 실질적으로 순액만을 정산하는 방식이다. 이 과정을 자동화함으로써 모든 참여국이 동등하게 의사결정과 집행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한다. 감지-제안-심의-집행의 순환 절차는 예측 가능한 다자 합의 구조로 작동한다.

이 시스템이 안정적으로 작동하려면 두 가지 설계 원칙이 핵심이다. 첫째는 권력 집중을 억제하는 투표 방식이다. 기존 국제기구에서는 경제력이나 군사력에 따라 의결권이 사실상 차등 배분되지만, 디지털 방코르 청산기구에서는 모든 참여국이 동등한 표를 갖는다. 여기에 적용되는 제곱투표(quadratic voting)는 특정 안건에 더 많은 표를 투입할수록 부담해야 할 비용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방식이다. 참여국은 중요한 사안에 더 큰 지지를 보낼 수 있지만, 그만큼 높은 비용이 수반되므로 과도한 영향력 행사는 자연스럽게 억제된다. 이로써 강한 소수 의견도 정책 결정에 반영될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

둘째는 인센티브 정합성이다. 디지털 방코르는 공동체의 지속가능한 이익이 각국의 자국 이익 추구와 자연스럽게 맞물리도록 설계된다. 이를 위해 무역 불균형에 대한 자동 조정 메커니즘, 과잉 적자국에 대한 패널티, 책임 분담에 따른 보상 체계 등을 포함한다. 이는 특정 국가의 일방적 이익 추구를 제어하고, 전체 시스템의 균형 있는 성장으로 이어진다. 디지털 방코르는 단순한 합의 플랫폼을 넘어 이해관계가 내적으로 조율되는 자기조정형 거버넌스를 지향한다.

통화 체제는 금융 인프라 영역을 넘어 국제정치의 핵심 기제다. 어떤 통화가 기준이 되고, 누가 청산 규칙을 설계하는지는 곧 글로벌 권력의 배분을 반영한다. 디지털 방코르는 이 권력의 중심축을 탈중앙화하고, 다자 협의를 통해 재구성하려는 도전이다.

디지털 방코르가 지향하는 다자 통화 질서는 세계시민주의적 상상력의 표현이다.
이는 보다 공정하고 포용적인 통화 인프라를 실현하려는 실험이자, 자동화된 절차를 통해 신뢰를 유지하며, 모든 참여국이 동등하게 정책 결정에 참여하는 시스템이다. 이 시스템은 국가 중심의 통화 주권을 넘어 연대와 상호의존성을 반영하는 새로운 프로토콜로 작동하며, 통화를 21세기 글로벌 공공재로 재구상할 가능성을 제시한다.

김종승 엑스크립톤 대표(블록체인법학회 부회장)

■다음 마지막 회차에서는 이를 실현하기 위한 제도화 조건과 실행 전략을 다룰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