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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하로 집을 삼고, 풍월로 벗을 사마'..韓 실험미술 선구자 이강소 개인전

'연하로 집을 삼고, 풍월로 벗을 사마'..韓 실험미술 선구자 이강소 개인전
서울 용산구 타데우스 로팍에서 열린 이강소 화백 개인전 '연하(煙霞)로 집을 삼고, 풍월(風月)로 벗을 사마' 전(展) 전경. 타데우스 로팍 제공

[파이낸셜뉴스] "그림에서든, 조각에서든 나의 어떤 맑은 기운과 관조자의 맑은 기운이 서로 교류할 수 있는 구조가 형성되길 소망한다."

한국 실험 미술의 선구자 이강소 작가(82)가 50년간 걸어온 실험 미술과 사유의 여정을 응축해 보여주는 전시가 서울 이태원에서 열린다. 글로벌 갤러리 타데우스 로팍은 이 작가와 손잡고 글로벌 미술 시장에서 새로운 도약을 시작하는 첫걸음인 개인전 '연하(煙霞)로 집을 삼고, 풍월(風月)로 벗을 사마' 전(展)을 오는 8월 2일까지 개최한다.

이번 전시는 지난해 9월 이 작가가 타데우스 로팍과 전속 계약을 체결한 이후 처음 선보이는 전시로, 한국 현대미술의 흐름 속에서 독창적이고도 선구적인 위치를 확립한 그의 작품세계를 조망한다. 설치, 회화, 조각, 판화 등 다양한 매체를 아우르는 작품 20여점이 소개된다.

전시 제목 '연하(煙霞)로 집을 삼고, 풍월(風月)로 벗을 사마'는 퇴계 이황의 시조 '도산십이곡' 제2곡에서 인용됐다.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며 자아를 우주적 질서에 조율하고자 했던 퇴계의 세계관은 이 작가가 예술에 임하는 자세와도 겹친다.

이 작가는 "퇴계의 자연관에 깊이 공명하며, 나의 예술 또한 자아를 표출하거나 고정된 실체를 구축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고 흘러가는 세계의 흐름과 조응하는 행위"라며 "마음과 우주가 하나가 되면 이때 나도 남도 탈각한다"고 설명했다.

그의 회화는 동아시아 수묵화의 사유와 서예적 붓질, 인상주의적 색채가 공존한다. 그의 유려한 붓놀림은 윌렘 드 쿠닝, 사이 톰블리를 연상시키기도 하지만, 그는 자아를 전면화하기보다 '기운생동(氣韻生動)'의 상태를 지향한다.

'연하로 집을 삼고, 풍월로 벗을 사마'..韓 실험미술 선구자 이강소 개인전
이강소 '섬에서-03037'. 타데우스 로팍 제공

전시장 입구에 배치된 회화 대표작 '섬에서-03037(2003)'는 안개처럼 흐릿하게 번지는 기운 위에 수직으로 교차하는 선들을 통해 섬이나 해안가와 같은 풍경을 연상시킨다.

이런 형상은 구체적인 대상을 묘사하기보다는 관람객들의 기억과 감각을 자극하며 작품을 마주한 각자 만의 해석에 다다르게 된다. 관람객이 자신의 기억 속 풍경이나 경험을 투영함으로써 작품과 관계를 맺고 그로써 개인적인 의미를 발견하길 기대한다고 이 작가는 전했다.

'연하로 집을 삼고, 풍월로 벗을 사마'..韓 실험미술 선구자 이강소 개인전
이강소 '청명'. 타데우스 로팍 제공

또 다른 회화 대표작 '청명淸明-16229(2016)'은 유려하면서도 속도감 있는 붓놀림이 서예와 수묵화에 대한 작가의 깊은 이해가 엿보이며 대담하고 즉흥적인 필치가 강한 시각적 인상을 남긴다.

이런 표현은 단순한 형상이나 구성의 차원을 넘어 작가의 신체적 리듬과 정서적 에너지가 응축된 움직임의 흔적으로 작용하며 작가 고유의 '기운생동'의 에너지가 작품 전반에서 여실히 확인된다.

'연하로 집을 삼고, 풍월로 벗을 사마'..韓 실험미술 선구자 이강소 개인전
이강소 청동작 '무제‑94095'. 타데우스 로팍 제공

조각 역시 회화의 제스처가 공간으로 확장된 결과다. 청동작 '무제‑94095(1994)'는 평면의 붓질을 입체로 구현했다. 타는 '배'를 둘러싸고 놓인 조각 덩어리들은 작가 특유의 유려하면서도 힘 있는 붓놀림을 연상시키며 회화에서 나타나는 필치의 에너지를 입체적으로 구현한 듯한 형상을 띤다.

'연하로 집을 삼고, 풍월로 벗을 사마'..韓 실험미술 선구자 이강소 개인전
이강소 '팔진도'. 타데우스 로팍 제공

'팔진도(1981/2017)'도 마치 솟아오른 산맥처럼 공간을 장악하며 회화와 조각의 경계를 넘는다. 이 작품은 중국 삼국지 최고의 전략가인 제갈량의 전략에서 착안한 것으로, 적을 교란시키기 위한 전술적 진형인 팔진도에서 영감을 받아 여덟 개의 문을 갖춘 구조로 설계됐다.

특히 이 설치는 장소에 따라 형태를 달리하며 무한히 변주될 수 있도록 고안했다. 겉보기에는 복잡하고 혼란스러워 보일 수 있지만 그 내부에는 관람객이 스스로의 길을 발견하도록 유도하는 질서 있는 동선이 숨어있다. 관람객들은 작가가 구성한 팔진 속으로 들어가 직접 길을 찾아가며 각자의 속도와 흐름에 따라 공간을 체험하게 된다.

타데우스 로팍 측은 "이번 전시는 회화, 조각, 판화, 설치 등 다양한 매체의 작품을 폭넓게 아우른 전시"라며 "한국 현대미술에서도 독창적이고도 선구적인 이 작가의 작품세계를 총망라하는 자리"라고 평했다.

한편, 이 작가는 지난해 국립현대미술관 회고전을 비롯해 테이트 모던, 구겐하임 미술관, 브루클린 미술관 등 세계 주요 미술관 전시에 참여하며 국제 활동을 꾸준히 이어왔다. 2021년 갤러리현대 개인전에서는 '청명' 시리즈와 '강에서' 연작을 통해 '기(氣)'의 표현을 강조하며 유럽 수집가들의 주목을 받은 바 있다.

rsunjun@fnnews.com 유선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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