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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이 얼마나 복 받은 것인지, 탁월한 행운인지 나는 몰랐다 [작가와의 대화]

신달자 시인의 고통이여 나의 친구여 !
■ 평범이라는 행운 ■

'평범'이 얼마나 복 받은 것인지, 탁월한 행운인지 나는 몰랐다 [작가와의 대화]
일러스트=정기현 기자
"나 같은 평범한 사람이 뭘…" 그 사람의 사는 평범은 어쩌면 그 누구보다 귀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 평범의 주인공은 그 보통과 평범을 지키기 위해 그 가족들 모두 무진장 참고 견디는 천사들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평범이야말로 인간이 바라는 적당한 온도의 행운이라는 것을.

잘 안다고 생각했던 분과 차 한 잔을 하고 헤어지는 순간 그가 무심히 날 쳐다보며 말했다.

"나 같은 평범한 사람이 뭘…."

나는 혼자 걸어오면서 생각했다. 그래, 그는 평범하지, 특별히 내놓을 것도 없는 사람이다. TV나 신문에 얼굴이 나오는 사람도, 사람들의 대화에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사람도 아니다. 부자도, 가난뱅이도 아니다. 본인의 말대로 지극히 평범해서 기억에 빛나게 솟아오르는 사람은 분명 아닌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나는 그 생각을 좀 더 길게 끌어갔다. 그런데 말이지. 그 사람은 반대로 별로 나쁠 것이 없는 사람이다. 딸 아들을 한 번의 낙방 없이 대학을 졸업시켜 별 놀라울 것도 없는 곳에 취직하여 적당한 나이에 결혼을 시키고, 다시 손주를 보고, 부부는 별로 말도 없이 인사동을 삼청동을 걸어 다니다가 광화문 교보에서 책을 읽다가 비빔밥을 먹고 집에 들어가는 그야말로 평범한 사람이다.

나는 생각한다. 그래, 그것이 과연 평범한 것인가를. 너무 늦게 생각해 본 것이다. 어쩌면 그 사람은 누구보다 귀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 사람의 사는 평범은 다른 사람에게는 탁월한 행운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너무 늦게 한 것이다. 그 사람은 내게 특별한 적이 없었다. 늘 그 사람의 옆 사람들이 나의 관심사였던 것이다. 이름이 사회에 알려져 있고, 자신의 일에 성공 그 자체였으며, 바둥바둥 오르는 일에 적응해 가는 그들을 나는 성공이라고 부르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들은 늘 엎치락뒤치락이었으며 가족이, 자신이 늘 불평과 위기에 몰리는 경우도 많았다. 생활과 일상이 잔잔한 적 없는 사람들이지만 자신의 이름에 전전긍긍하는 그들을 '성공'이라고 나는 이미 수첩에 적어 놓았는지 모른다.

그런데 평범을 자처하는 그 사람은 격랑의 파도가 거의 없었다. 늘 고요했고 잔잔했다. 물론 그 나름으로 파도가 있었겠지만 그것은 아주 기본적인 인간 삶의 파도였을 것이다. 그 사람은 스스로 '못난 사람'이라고도 했었다. 그런데 그 사람의 평범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얼마나 복 받은 것인지 모른다고 나는 생각했다. 너무 모자라도 넘쳐도 안 된다는 것은 지난해 장마 때도 느낀 일들이다. 그때 가뭄으로 논밭이 타들어 가 땅이 쩍쩍 갈라진 것을 보면서 가슴도 그렇게 갈라지지 않았던가. 눈물이라도 마구 흘려 그 땅을 적시고 싶은 마음이 넘치곤 했었다. 그런데 비가 오긴 했으나 물 폭탄으로 쏟아져 가뭄보다 못하게 상처를 내며 할퀴고 지나갔던 것이다.

보통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테레사 수녀님은 말했다. "우리는 위대한 일을 할 수 없다. 다만 위대한 사랑으로 작은 일에 동참할 수는 있다."

그 평범의 주인공은 그 보통과 평범을 지키기 위해 그 가족들 모두 무진장 참고 견디는 천사들이었을 것이다. 과도한 것에는 손대지 않고 욕구를 억누르며 가능한 일에 최선의 성실을 쏟은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인생에서 과욕을 참을 줄 안다는 것은 이미 성인 대열이다.

그는 정말 삶에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아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안정이고 평화이며 별로 뜨겁게 사랑하지 않아도 손잡고 삼청동을 거니는 노부부의 노력에서 빚어지는 삶의 행운일 것이다. 그렇다. 노후에 맛보는 싱겁기도 하고 맛도 별로 없지만 편안하고 우수한 사랑의 영양 떡이 아니겠는가.

우리가 흔히 보물로 생각하는 네잎 클로버는 '행운'이라는 엄청난 덤을 얻는 것이므로 네잎 클로버는 우리들의 우상이기도 하다. 결코 눈에 쉽게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흔하디흔한 세잎 클로버는 '행복'이다. 그만큼 행복은 흔하게 우리들 주변에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행복을 바라면서 행복을 알아주지 못한 무례를 저지르며 살았는지 모른다.

중학생 때 수업이 끝나면 모두 언덕으로 올라가 네잎 클로버의 행운을 찾았다. 나는 단 한 번의 행운을 찾지 못했다. 그땐 실망했다. 행운은 나에게 너무 먼 존재라고 느꼈지만 나는 고향을 떠나면서 나의 행운은 아직 남아있다고, 나는 아직 행운을 사용하지 않았다고 마음을 바꾸었던 기억이 있다. 사실 그러했다. 왜 행운은 오지 않느냐고 따질 일이 아니다.

행운은 천천히 정말 필요할 때 저마다 오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을 한 것은 나이 때문일까.

푸른 여름 저녁 오솔길에 가리

보라향기에 취하여 풀을 밟으면

꿈꾸듯 발걸음은 가볍고

머리는 부는 바람에 시원하리

아무 말 없이 아무 생각 없이

한없는 사랑을 가슴가득 안고

방랑객처럼 나는 멀리 멀리 가리

연인과 함께 가듯 자연 속을 기꺼이 가리

프랑스의 천재 시인 랭보(1854~1891)는 17세에 이미 프랑스 문단을 좌우한 시를 쓰기 시작했다. 5년 정도 시를 쓰고 사막에서 방랑의 시간을 보내다가 죽었지만 그의 시는 프랑스를 벗어나 세계의 시로 퍼져갔다. 그것은 경이롭고 성스러울 정도였다. 랭보의 고향 샤를빌메지에르에 있는 박물관에는 아직 그의 시가 살아있고, 방황의 시절 들고 다니던 가방이 그대로 남아 있다. 어쩌면 그의 천재온도가 조금만 낮았더라면 랭보는 긴 생명을 유지했을 수도 있다.

요즘 너무 덥다. 여름은 '이 정도의 더위'라는 평범한 온도를 넘겨버렸다. 여름의 더위를 우리는 경험으로 인지하고 있다.
그것은 평범한 생각이다. 그러나 기후는 우리에게 평범을 뛰어넘는 더위를 경험하게 한다. 이런 순간에도 생각한다. 평범이야말로 인간이 바라는 적당한 온도의 행운이라는 것을.

신달자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