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6년 시음회 '파리의 심판' 서 1위 차지
美 나파밸리, 세계적 와인산지로 부상 계기
'미국을 만든 역사적 유물'로 등재 되기도
현재는 이탈리아 안티노리 가문이 인수
유통사 아영FBC "美 와인 정체성 그 자체"
지난 5월 스택스 립의 마커스 노타로 수석 와인메이커가 한국 론칭을 알리는 시음회에서 기자들에게 설명하고 있다. 사진=이환주 기자
현재 스택스 립의 지분을 100% 소유한 이탈리아 와이너리 안티노리의 대표 와인들. 사진=이환주 기자
우리 말은 '맛'에 대해 묘사할 때 제일 먼저 맛이 '있다'와 '없다'로 구분한다. 직관적이고 단순한 표현 방식이지만, 맛에 대해 깊이 들어가면 이를 구체적으로 서술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와인을 한 번도 먹어본 적 없는 사람에게 과당이 잔뜩 들어간 포도주스와 한 병에 100만원을 훌쩍 넘는 프랑스 와인을 주고 맛을 평가하라고 하면 보통은 전자가 '더 맛있다'라고 말할 것이다. 와인에서 말하는 맛의 깊이란 단순히 있고 없음의 차원이 아니라 더 깊숙한 무엇이기 때문이다. 와인의 맛을 평가하는 '테이스팅'이 어려운 것도 이 지점이다. 색으로 비유하면 흰색과 검은색의 사이에 무수히 많은 회색이 존재하는 것처럼 맛 역시 단순히 '있고', '없음'을 벗어난 깊은 세계가 있기 때문이다.
■'파리의 심판' 그 와인, 한국 상륙
'파리의 심판'은 1976년 프랑스에서 열린 와인 블라인드 테이스팅(시음회)이다. 1976년은 미국이 독립한 지 200년째 되는 해로 파리의 심판을 통해 미국 나파밸리 와인도 세계 와인 역사에 우뚝 설 수 있었다. '스택스 립' 와인 셀러는 블라인드 시음회에서 샤토 무통 로쉴드, 샤토 오브리옹 등 프랑스 최고급 보르도 와인을 제치고 1973년산 S.L.V. 카베르네 소비뇽으로 레드 와인 부문 1위를 차지했다. 이 사건으로 프랑스 중심의 와인 산업 구조가 바뀌고 미국 나파밸리가 세계적인 와인 산지로 부상했다.
파리의 심판을 주관한 영국의 와인 상인 스티븐 스퍼리어는 미국과 프랑스의 자존심을 건 와인 테이스팅의 심판으로 9명 모두 프랑스 심판단을 모집했다. 그는 해당 이벤트를 위해 여러 매체를 초청했으나 오직 타임 파리 지국 기자인 조지 테이버만 참석했다. '파리의 심판'이라는 제목(1976년 6월 7일자)의 짧은 4단 기사였지만 이 기사는 후에 와인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뉴스 기사로 평가 받았다.
파리의 심판을 통해 세계의 주목을 받은 와이너리 '스택스 립'의 명칭은 '숫사슴의 도약'을 뜻한다. 나파밸리 절벽에서 사냥을 피해 달아나던 숫사슴이 큰 절벽을 뛰어넘었다는 이야기에서 유례했다. 숫사슴은 강인함, 우아함, 생명력을 상징한다.
지난 5월 스택스 립 와인 셀러의 국내 첫 론칭 행사를 위해 내한한 마커스 노타로 수석 와인메이커는 "스택스 립은 파리의 심판에서 레드 와인 1위를 차지해 미국 와인 역사를 바꾼 사건의 주인공"이라며 "이 와인은 스미소니언 박물관에 '미국을 만든 역사적 유물'로 등재됐다"고 설명했다.
■60년 넘은 스택스 립 와인… 현재는 이탈리아 와이너리
1961년 미국 와인 산업의 선구자 네이든 페이는 스택스 립 지역에 처음으로 카베르네 소비뇽을 심었다. 나파밸리 지역은 포도재배에 부적합하다는 편견이 심했지만 그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은 역사가 증명했다. 그로부터 불과 15년 뒤 스택스 립의 카베르네 소비뇽 레드 와인은 프랑스 와인을 뛰어 넘는 평가를 받았기 때문이다.
스택스 립 와이너리의 창립자인 워렌 위니아스키는 1970년 S.L.V. 빈야드를 인수한다. 그는 미국 와인의 아버지로 불리는 앙드레 첼리체프와 함께 전설적인 와인 '캐스크 23'을 양조했다. 더불어 그는 페이의 철학을 계승한 '페이' 와인도 출시했다
스택스 립의 레드 와인은 포도밭에 따라 크게 4종이다. △아르테미스 카베르네 소비뇽 △페이 카베르네 소비뇽 △S.L.V. 카베르네 소비뇽 △캐스크 23 카베르네 소비뇽 등이다.
스택스 립의 최상급 라인인 '캐스크 23'은 초기에는 S.L.V에서 나오는 최상급 와인이었다. S.L.V 와인 중 유독 맛이 뛰어났던 1974년 당시의 캐스크 넘버를 딴 것이었다. 이후 워렌 위니아스키는 페이 와이너리도 인수하는데 그 이후에는 S.L.V의 최상급 와인, 페이의 최상급 와인을 블렌드해 만든 와인이다.
마커스 노타로는 "페이 카베르네 소비뇽은 파워풀하고 S.L.V는 엘레강스한 맛을 특징으로 한다"며 " 캐스크 23은 페이와 S.L.V의 정수를 담은 궁극의 와인"이라고 말했다.
2007년 스택스 립 와인 셀러는 설립자 워렌 위니아스키의 은퇴와 함께 미국 워싱턴주의 샤토 생 미셸과 이탈리아의 안티노리 가문이 공동 인수하게 된다. 안티노리는 1385년부터 와인을 생산해온 유럽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와인 가문 중 하나로 현재 26대에 걸쳐 가족 경영을 이어오고 있다. 이후 안티노리는 2023년과 2025년에 걸쳐 샤토 생 미셸과 워렌 위니아스키가 보유하던 지분 및 포도원을 인수해 스택스 립 와인 셀러의 단독 소유주가 됐다. 미국 와인의 역사를 썼던 스택스 립의 주인이 이제는 이탈리아 전통 와이너리가 된 것이다.
■역사의 향기를 담은 스택스 립 와인
1976년 '파리의 심판'의 주역이었던 와인을 지금의 우리도 맛볼 수 있을까? 절반은 그렇다 이고, 절반은 그렇지 않다가 정답이다. 먼저 1976년 우승을 차지한 1973년산 S.L.V. 카베르네 소비뇽 와인 중 아직 마개를 따지 않은 와인이 몇 병 남아있다. 하지만 시간과 함께 숙성된 그 와인은 1976년 3살이던 무렵과는 맛이 변했을 것이다.
지난 5월 현장에서 같은 와인은 2020년산 S.L.V. 카베르네 소비뇽을 맛볼 수 있었다. 같은 와인이지만 전혀 다른 와인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40년이 넘는 시간 동안 해당 지역의 기후는 물론 와인을 제조하는 기술 역시 상당한 발전을 이뤘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지금처럼 와인 발효에 영향을 주는 미생물에 대한 조절이 어려웠고, 와인 제조 과정에서 쿨링 등을 통해 와인의 온도를 맞추는 것도 쉽지 않았다. 또 유명세를 타며 생산량도 늘었고 그에 따라 저장기간 컨트롤, 와인 캐스크 등 많은 것이 변했기 때문이다.
스택스 립 관계자는 "1970년대 포도 나무들은 나무도 크고 줄기도 커 공간을 많이 차지했고 당시 포도밭에 질병이 유행하면서 대부분 뽑아 낸 다음에 다시 심어야 했다"며 "현재 파리의 심판 당시 포도가 열렸던 1972년의 S.L.V. 포도밭 일부가 남아있다"고 설명했다.
스택스 립은 국내에 여러 수입사를 통해 유통돼 왔다. 지난 5월부터는 아영FBC가 단독 유통사로 와인의 역사를 간진한 스택스 립의 와인을 제공한다.
아영FBC 관계자는 "스택스 립 와인 셀러는 단지 하나의 와인 브랜드가 아니라 미국 와인의 기원을 보여주는 정체성 그 자체"라며 "미국 프리미엄 와인 포트폴리오에 지속적인 정성을 들여온 노력의 결실이며 와인 시장에서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전략적 행보"라고 말했다.
hwlee@fnnews.com 이환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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