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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초포럼] 전력망이 고속도로가 되려면

[서초포럼] 전력망이 고속도로가 되려면
김영산 한양대 경제금융대학 교수
새 정부 들어서 에너지고속도로 사업이 부각되고 있다. 원자력과 재생에너지 중심으로 전력산업이 재편되면서 전국적인 전력망 확장이 시급한데, 기존의 육상 고압교류송전망은 주민수용성과 인허가 문제 때문에 제대로 진척이 안 되고 있다.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서해안을 따라 고압직류(HVDC)송전망을 건설하는 것이 서해안 에너지고속도로 사업이고, 이를 남해와 동해로 확장하여 우리나라 전체를 둘러싸는 U자형 송전망을 건설하는 것이 한반도 에너지고속도로 사업이다. 사실 서해안을 따라 직류송전망을 건설하는 사업은 2038년까지 3단계로 진행하기로 이미 계획이 수립되어 있었는데, 이를 앞당겨 2030년까지 완성하고 나머지 남해·동해 송전망은 2040년까지 완성한다는 것이 에너지고속도로 사업의 핵심이다. 광역송전망이라는 기존 개념에 '고속도로'라는 새로운 수사를 붙인 것은 대통령의 핵심 선거공약으로서 유권자에게 강력한 인상을 주기 위해서이다. 고속도로는 우리나라의 압축적 경제성장을 상징하는 강력한 서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1960년대 말 당시 국가예산의 23%에 해당하는 초대형 국책사업인 경부고속도로 건설은 자금조달과 정치권의 반대 등으로 난관이 많았지만, 박정희 대통령이 비전과 뚝심으로 밀어붙인 결과 2년 만에 완공되어 1970년대 이후 경제성장의 초석이 되었다. 지금은 국토를 거미줄처럼 연결하는 고속도로망이 여객과 화물 수송의 대부분을 담당하고 있다. 당연히 국민들은 고속도로라는 단어에서 지도자의 비전과 추진력, 인프라 건설을 통한 경제발전을 연상하게 된다.

그러나 전력망이 단순히 전력 수송수단을 넘어서 고속도로라는 명칭에 걸맞은 역할을 하려면 그 운영방식도 변화해야 한다. 고속도로가 물류를 획기적으로 발전시켜 경제성장을 주도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그 개방성에 있다. 철도와 달리 고속도로는 정해진 통행료만 내고 교통법규만 준수하면 누구든지 언제 어디에서 어떤 차량을 이용하든 제한 없이 이용할 수 있다. 통행료는 합리적으로 책정되어 누구도 불이익을 받지 않는다. 이처럼 모두에게 주어진 자유롭고 공평한 물류 기회는 새로운 비즈니스를 이끄는 동력이 되었다. 전력망 역시 이렇게 개방적으로 운영될 때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비즈니스 모델을 창출하는 진가를 발휘할 수 있다. 누구든지 적정한 이용료를 내고 전력망을 이용할 기회를 열어주면 전력망을 중심으로 새로운 에너지생태계가 생성되면서 명실상부한 에너지고속도로가 되는 것이다.

현재 우리의 전력망은 매우 폐쇄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한전이 모든 발전소의 전기를 구매하고, 이후 송배전과 최종 판매까지 전 과정을 독점한다. 제3자끼리 전기를 사고팔 수 없고, 송배전망을 이용할 수도 없다. 유일한 예외로 재생에너지 전력을 특정 소비자에게 직접 판매하는 PPA 제도가 있는데, 이 경우에는 한전이 특별히 책정한 이용료를 내고 전력망을 이용할 수 있다. 다른 전원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물론 전력계통은 수급 불균형이 생기거나 송전망 과부하가 걸리면 대정전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전력망 이용을 엄격히 감시·통제할 필요가 있다. 전력망 부족 시기에는 망이용료도 수혜자부담원칙에 따라 차등하여 책정해야 한다. 그렇지만 지금처럼 제3자 사이의 전력 거래와 전력망 이용을 아예 금지해서 관련 비즈니스 기회를 원천봉쇄할 필요는 없다. 이런 예는 선진국 중에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전력망은 수많은 전력 생산·소비·저장 주체들이 서로 거래하고 협력하고 경쟁할 수 있는 개방된 플랫폼으로 거듭나야 한다. 그래야만 미래 에너지산업의 획기적인 발전을 위한 새로운 아이디어들이 쏟아져 나올 수 있다. 고속도로를 건설·운영하는 도로공사가 그 이용까지 독점했다면 과연 오늘날의 물류혁명이 가능했을 것인지 생각해 볼 일이다.

김영산 한양대 경제금융대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