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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n광장] '결핍의 터널'에서 빠져나오자

무언가 부족하다고 느끼는 순간
좁고 긴 터널에 갇혀 앞만 주시
눈앞 일 외에 다른 것 보지못해
결핍이 '일시적 바보'로 만들어
여유 없는 '결핍의 터널' 벗어나
파란 하늘과 봄햇살을 맞이하자

[fn광장] '결핍의 터널'에서 빠져나오자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명예교수·DGIST 석좌교수
무언가에 늘 쫓기는 사람이 있다. 젊어서도, 나이 들어서도 시간이 없다고 허둥댄다. 돈에 쪼들리는 경우도 그렇다. 언젠가는 인생 필 날 있겠지 생각했는데, 그다지 나아지는 것 같지 않다. 반면 평균보다 훨씬 다양한 일들에 둘러싸여 바쁜데도 시간에 쫓기지 않고 여유 있는 사람, 그렇게 부유하지 않은데도 먼저 베푸는 사람들도 있다. 늘 쫓기듯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부족한 것이 실제 시간이나 돈이 아니라는 방증이다. 물질의 결핍보다는 정신적 결핍, 마음의 문제다.

결핍이란 내가 확보한 자원보다 필요한 게 많다고 느끼는 주관적 감각이다. 경제적 결핍, 시간의 결핍, 관계의 결핍 모두 내 마음이 부족함에 사로잡힌 상태에 지나지 않는다. 행동경제학자인 센딜 멀레이너선과 심리학자 엘다 샤퍼는 '결핍의 경제학(Scarcity): 결핍은 우리를 어떻게 변화시키는가'에서 결핍의 핵심은 물리적 부족함이 아니라 그 부족함에 우리의 인지적 에너지가 잠식되는 상태라고 정의했다. 우리는 사물을 판단하거나 복잡한 문제를 풀고, 유혹을 참으며 장기적 계획을 세울 때 인지적 에너지를 사용한다. 이 에너지는 무한한 게 아니라 한정된 자원이다. 그런데 결핍에 직면한 뇌는 당장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인지 용량의 큰 부분을 사용하게 되고, 무언가 부족하다고 느끼는 순간 뇌에 과부하가 걸리면서 인지적 공간을 점령한다. 즉 당장 내야 할 공과금이나 코앞으로 닥친 마감기한에 대한 생각이 우리 뇌를 장악해버리는 것이다.

실제로 금전적 걱정에 휩싸인 사람의 뇌는 변화가 일어나 인지 능력에 영향을 미친다. 한 실험에 의하면 지능(유동지능)이 일시적으로 13점이나 하락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밤을 꼬박 새운 사람이나 알코올 중독상태와 비슷한 수준이다. 가난해서 혹은 바빠서 실수를 저지르는 게 아니라 결핍이 우리를 일시적으로 바보로 만드는 셈이다.

돈이나 시간은 없고 결정해야 할 것은 많은 상황 속에서 결핍은 지적 능력을 마비시킨다. 게다가 무언가 부족해지면 우리 마음은 그 당장의 결핍을 해결하기 위해 좁고 긴 터널 안으로 들어가는 터널링이 일어난다. 물론 터널로 진입하는 초기에는 우리는 긴장하고 각성하여 집중한다. 그래서 더 절약하거나 다른 부업을 찾는 노력을 하고, 마감이 임박하면 밤새워 집중해 일을 처리한다. 몇 주일에 걸쳐 해야 할 일을 며칠 만에 해내기도 한다. 문제는 그 터널이 오랫동안 지속될 때다.

내일 당장 갚아야 할 카드값이나 한 시간 뒤로 다가온 마감시간에 쫓기는 일이 반복되다 보니 눈앞의 일 외의 다른 것들은 보지 못하게 된다. 시야가 좁아져 터널을 빠져나와도 파란 하늘이나 옆을 스치는 풍경들을 즐기지 못하고 앞만 주시하며 나아간다. 운동, 저축, 가족과의 대화 같은 터널 밖의 중요한 일들이 밀려난다. 급전을 빌려 오늘의 빚을 막고 잠을 줄여 오늘의 업무를 끝내지만, 이는 결국 내일의 더 큰 이자와 더 깊은 피로로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고, 돈이 없고 시간이 없다는 결핍감은 더 짙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야말로 악순환의 연속이다. 여유가 생겨도, 장기적 관점의 저축을 하거나 남은 시간을 가족여행 등의 리프레시 기회로 채우는 인지 능력이 상실된다. 결국 결핍은 또 다른 결핍을 낳는다. 노력해도 가난해지고 시간에 허덕이는 건 게을러서가 아니라 결핍이 만든 터널 안에 갇혔기 때문이다. 아주 작은 계산착오나 예상치 못한 사건 하나가 스스로를 이 터널로 밀어넣어 전체 삶의 시스템을 붕괴시키는 것이다.

결핍된 사람에게 여유(Slack)가 없다는 것은 실수를 허용할 공간이 없다는 뜻이다. 그 작은 여유공간의 결여는 지적 능력을 마비시킬 만큼 극도의 스트레스를 생성시킨다. 그러니 돈이, 시간이 없다고만 하지 말고 좁은 시야 밖 중요한 가치들을 위해 쓸 공간을 만들어 둬야 한다.
매일의 어떤 시간대, 1개월 혹은 1년 중 한때를 비워두거나, 마음껏 누릴 작은 사치를 위해 여유분의 자금을 조금씩 저축해 두거나 하는 식으로 말이다. 이런 작은 여유들이 쌓였을 때 가져오는 효과는 예상외로 크다. 슬기로운 사고와 판단으로 어리석은 결정을 막아주고, 과제에 몰입할 수 있어 훨씬 좋은 결과를 안겨준다.

따스한 봄기운이 퍼지는 계절. 새봄에는 내일을, 미래를 계획하게 하는 마음의 여유분을 남겨두는 습관을 길러보면 어떨까. 그렇게 마음의 결핍에서 조금씩 해방되어 보자. 좁은 시야에 갇혀 보이지 않았던 결핍의 터널 밖 풍경이 얼마나 찬란한지 비로소 느끼게 될 테니.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명예교수·DGIST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