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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럼] 난파선에서 노를 젓는 현대인

[포럼] 난파선에서 노를 젓는 현대인
김길웅 성신여대 인문융합예술대학 명예교수
불확실한 미래, 통제 불가능한 현실의 절벽을 앞에 두고 살아가는 현대인의 초상으로 자주 '난파선에 올라탄 선원'이라는 비유가 사용된다. 화가 테오도르 제리코가 그린 '메두사호의 뗏목'은 이 위기 상황을 잘 보여준다. 파스칼이 팡세에서 남긴 "당신은 이미 배에 올라탔다"라는 말처럼, 우리는 선택 여부와 상관없이 이미 현실이라는 배에 올라타 항해를 하고 있다. 폭풍우 속에서 망망대해를 떠도는 난파선에 탄 우리는 이 절대적인 현실을 어떻게 이겨낼까.

신화시대의 인류는 번개라는 거대한 자연 폭력에 압도당할 때, 이를 '제우스의 분노'로 명명하고 황소를 제물로 바쳤다. 정체 모를 천둥 번개에 이름을 붙임으로써 고대인은 불안을 이겨낼 정신적 도구를 마련한 것이다. 이처럼 신화적 서사는 허구의 이야기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절대적인 현실이 가져다주는 정체 모를 불안을 이해하고, 이로부터 거리를 두는 기술이다. 역사철학자 한스 블루멘베르크에 따르면,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간은 위압적인 현실의 불안을 넘어서기 위해 시대에 따라 다양한 신화를 수용하고 변형해 왔다.

프로메테우스 서사가 대표적이다. 프로메테우스 신화의 변천사는 인류의 '정신적 투쟁기'와 같다. 고대의 인류가 불을 가져다주는 프로메테우스 서사로 자연의 공포를 이기고 문명을 이루는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립해 나갔다면, 괴테의 프로메테우스는 역경을 이기고 스스로 삶을 개척하는 근대적 주체의 자화상이다. 현대에 이르면 모습이 사뭇 달라진다. 카프카는 프로메테우스의 결말을 이렇게 묘사했다. "신들도 지치고, 독수리도 지치고, 상처도 지쳐 아문다. 남은 것은 설명할 수 없는 바위산뿐이다." 그는 본질을 알 수 없는 절대적 현실, 현대인이 마주한 거대한 불안의 실체를 '설명할 수 없는 바위산'으로 표현한 것이다. 유한한 인간이 이 거대한 바위산을 단번에 정복하거나 없앨 수는 없다. 하지만 좌절하는 대신 '설명할 수 없는 바위산'으로 명명함으로써 비로소 이 현실의 본질을 파악하고 방향을 잡아나갈 수 있다. 우리의 관점으로 세계를 은유하고 명명할 때, 세계는 우리가 파악하고 이겨낼 수 있는 영역 안에 들어온다. 물론 이름 붙이는 것만으로 삶의 방향이 완전히 달라지지는 않는다. 그것은 출발점일 뿐이다. 우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어떤 가치를 따라 살아갈 것인지 선택해야 한다.

그렇다고 이러한 주체성이 자기만의 세계에 갇힌 편파적인 주관주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언제나 타인과 함께 상호주관적인 세계에서, 함께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고 의미를 공유하며, '세계 내적 존재'로 더불어 살아간다. 이런 맥락에서 키르케고르가 말한 '신 앞에 선 단독자'라는 개념은 깊은 울림을 준다. 신 앞에 선 단독자는 세상의 유용성이나 손익계산을 넘어, 자신이 옳다고 믿는 가치를 붙들고 외롭게 결단하는 사람이다.
불확실한 현실이라는 바위산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을 외면하지 않고 자신의 언어로 이해하며, 자신이 부여한 가치인 '노'를 붙잡을 때 우리는 난파선 위에서도 방향을 잃지 않을 수 있다. 폭풍우를 멈추게 할 수는 없지만 어떤 방향으로 노를 저을 것인지를 우리는 깨닫게 될 것이다.

김길웅 성신여대 인문융합예술대학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