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가 황금알을 낳기 시작하자
노동조합·금융투자업계 등 돈잔치
정책당국은 호남반도체 투자 발표
외국인 투자자 코리아 디스카운트
앞선 세대 50여년간 이룩한 성과물
미래세대 위해 당면과제 성찰해야
김경준 전 딜로이트컨설팅 부회장
15세기 대항해 시대의 개막으로 서양 열강이 세계 각지에 진출하였다. 중남미에는 사탕수수, 커피, 바나나를 경작하는 대규모 농장인 플랜테이션이 우후죽순으로 들어섰다. 20세기 식민지에서 독립한 국가들은 바나나 공화국으로 불렸다. 단일작물 기반의 취약한 경제구조, 정치불안정과 빈번한 정변, 양극단 사회구조라는 후진성을 투영한 경멸적 명칭이다.
최근 우리나라 반도체 산업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난장판을 보면 반도체 단일품목 플랜테이션 국가라는 비유적 표현이 연상되는 후진적 행태의 연속극이다. 반도체를 생산하지만 관련한 제도와 정책, 운영역량 측면에서는 바나나 공화국과 피장파장이라는 의미이다. 첨단제품을 생산하는 산업기술적 하드웨어와 플랜테이션 수준인 낙후된 정치사회적 소프트웨어의 간극이 파멸적 상황이다.
반도체 초호황은 실력보다 행운이다. 미국의 인공지능(AI) 투자 급증과 미국·중국 패권경쟁에 따른 시장 분절이 증폭되었다. 불과 1년 전 삼성전자가 5만전자로 조롱당하고 중국 굴기에 전전긍긍하던 상황의 급반전이다. 반도체가 황금알을 낳기 시작하자 사방팔방에서 이런저런 명분으로 숟가락을 들고 달려들기 시작했다.
먼저 삼성전자 노동조합이 나섰다. 높은 성과에 높은 보상은 당연하지만, 금번에는 영업이익 일정 비율의 성과급 보장을 요구하고 전면파업까지 들고나왔다. 경영악화-적자발생에도 급여삭감-정리해고가 병행되지 않으니 책임은 분리하고 과실만 가지겠다는 요구에 무기력한 경영진은 굴복하였다. 금융투자업계는 돈잔치를 벌이고 있다. 국내 주식시장 시가총액 절반 수준의 삼성전자·SK하이닉스에 대한 단일종목 레버리지 상장지수펀드(ETF)라는 기형적 금융상품을 출시하여 종합주가지수가 중소형 잡주처럼 급등락하면서 각종 신기록이 양산된다. 개인투자자들을 호도하여 수수료 대박을 터트린 증권회사들이 내세우는 환경·사회·지배구조(ESG) 경영의 구호가 위선적이다.
초과이익 배분 요구도 등장했다. 정상이익과 초과이익의 구분 자체가 추상적이고 선동적 개념이다. 산업-기업별로 상이한 경기사이클, 투자규모, 원가구조에서 결정되는 현금흐름과 이익에서 보편적인 기준이 설정되기 어렵다. 정책당국은 호남 반도체 투자를 발표하면서 국가기간산업의 미래를 정치적 영역으로 끌고 들어갔다. 외국인투자자들이 해당 기업의 독자적인 사업성 판단 여부에 의문을 가지면서 신개념의 코리아 디스카운트로 연결되고 있다.
반도체 초호황의 떡고물에만 정신이 팔려 있는 관련자들에게 음수사원(飮水思源)과 거안사위(居安思危)의 덕목이 필요한 시점이다. 음수사원, 물을 마실 때에는 원천을 생각하며 감사하고 겸손해야 한다. 반도체 산업에서 오늘날의 과실이 있기까지 50여년이 걸렸다. 1974년 경기 부천에 설립된 한국반도체로 시작해 1982년 '반도체공업육성추진위원회'가 구성되면서 국가적 미래산업으로 규정되었다. 1983년 2월 삼성이 반도체 사업 진출을 공식 선언하면서 본격화되었다.
당시 반도체 산업 육성에 대해 경제기획원과 한국개발연구원(KDI)은 경제적 타당성이 낮다는 이유로 반대하였다. 심지어 삼성의 기흥 반도체공장 건설에 대해 농수산부는 '쌀이 부족한데 농지를 공장부지로 전용하면 막대한 차질이 빚어진다'는 명분으로 반대할 정도였다. 하지만 국가 지도자의 비전, 정책담당자의 실행력, 기업가의 결단이라는 3박자로 반도체 산업은 시작되었다. 오늘날의 성과는 앞선 세대의 과감한 도전과 끈질긴 노력이 축적된 결과물이다.
거안사위, 편안할수록 향후의 위태로움을 생각하고 대비해야 한다. 현재 반도체 초호황의 지속성에는 한계가 있다. 오히려 AI투자 정체, 미국·중국 간 반도체 교역 재개, 중국기업 약진으로 급변할 위험성이 우려된다. 미국의 중국에 대한 반도체 수출입 차단이 완화될 가능성도 상존한다. 실제로 반도체 가격급등으로 칩플레이션이라는 신조어가 등장하는 가운데 미국 애플이 중국산 반도체 구입을 타진하고 있다. 급부상하는 중국의 창신메모리(CXMT)는 상하이증권거래소에 7월 말 상장하여 조달한 자금으로 대규모 투자에 나설 예정이다.
반도체 초호황이라는 로또를 맞은 주식시장의 급등락은 광기와 절망이 교차하는 특성상 자연스럽다.
하지만 미래의 경쟁력을 고민하고 제도를 정비할 정책당국과 관련업계의 부화뇌동은 소위 바나나 공화국의 후진적 행태이다. 행운을 실력으로 착각하는 순간 파국은 시작된다. 앞선 세대의 헌신에 감사하면서 미래 세대를 위해 실행할 당면과제를 각자의 위치에서 차분하게 성찰해야 한다.
김경준 전 딜로이트컨설팅 부회장
※ 저작권자 ⓒ 파이낸셜뉴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