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애리 덕성여대 약대 석좌교수
올여름 전국적으로 체감온도가 최고 40도에 육박했다. 폭염에 지쳐 현관문을 열 때마다 더위를 시원하게 씻어주는 에어컨이 참 고마웠다. 문득 스위스에 사는 딸 생각이 났다. 그곳도 폭염이 이어지는데, 집은 물론 식당에도 냉방기가 거의 없다고 했다.
국제에너지기구(IEA)에 따르면 유럽의 가정용 에어컨 보급률은 20%대에 불과해 한국 98%, 미국 90%와 대비된다. 서늘했던 기후, 오래된 건축물, 비싼 전기요금, 냉방을 사치로 여겨온 문화가 겹치며 유럽은 반세기 넘게 '에어컨 없는 여름'을 당연하게 받아들여왔다. 그러나 그 당연함이 올해 흔들렸다. 세계보건기구(WHO)는 6월 유럽을 덮친 기록적 폭염으로 1300명 이상의 초과사망이 발생한 것으로 추정했다. 프랑스에서만 1000명을 넘었고, 남서부 피소스에서는 기온이 역대 최고인 44.3도까지 치솟았다. 열은 심장과 신장에 부담을 가중시키며, 고령자와 혈관·신장질환자에게 특히 치명적이다. WHO 사무총장이 열 스트레스를 '조용한 살인자'라고 부른 까닭이다.
한국도 안심할 수 없다. 정부는 올여름 최대 전력수요를 98.8GW로 전망했고, 냉방 수요 집중으로 인한 전력구조의 취약성도 드러났다. 반도체와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의 냉각 전력도 새로운 부담이다. 무엇보다 냉방 격차가 문제다. 서울 저소득 가구의 에어컨 보유율은 20%에도 못 미친다. 정부가 에너지바우처 대상을 확대하고 고효율 냉방기 보급사업을 추진하고 있지만, 폭염이 매년 반복되는 현실을 생각하면 지원도 일회성에 머물러선 안 된다. 필요할 때마다 도움을 요청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최소한의 냉방을 보장하는 상시적 안전망을 갖춰야 한다. 국책연구 현장에서 자주 목격한 패턴이 있다. 재난은 늘 사후에야 예산을 부른다는 것이다. 가뭄이 심하면 그해 예산이 늘고, 산불이 나면 그 계절에 지원이 집중된다. 위기가 지나가면 관심과 예산도 함께 줄어든다. 폭염도 다르지 않다. 사망자가 발생해야 대책반이 꾸려지고, 계절이 바뀌면 존재감도 사라진다. 바로 지금이 그 관성을 끊어낼 때다.
폭염은 더 이상 예외적 재난이 아니라 기후위기가 만든 매년의 상수다. 에너지바우처의 상시화, 폭염의 법정 재난 관리체계 강화, 다년도 예산 편성, 무더위쉼터 상시 운영, 야외노동자 휴식권 점검, 녹지와 쿨루프 확대를 꾸준한 정책으로 이어가야 한다. 에너지 효율이 높은 냉방기술, 열에 강한 인프라, 패시브 설계, 열저장 기술 육성도 필요하다. 재생에너지와 분산전원을 확대하고 에너지저장장치(ESS)로 전력 피크를 분산하며, 노후 송배전망을 보강하는 일도 중요하다. 폭염 대응력은 한 사회가 기후위기에 얼마나 준비돼 있는지를 가늠하는 척도다.
예전에는 여름철 유럽 여행이 낭만적인 꿈이었다. 고색창연한 건축물 사이로 선선한 바람이 스치는 풍경을 동경했다. 이제 그 여름은 조금씩 두려움의 대상이 되어가고 있다.
올해의 폭염은 지나갔지만, 내년 여름은 더 더울 것으로 예상된다. 에어컨을 켜며 느끼는 안도감이 누군가에게는 여전히 사치라면, 폭염은 이미 또 다른 불평등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다음 폭염을 견디는 일이 아니라 폭염이 와도 누구도 홀로 견디지 않아도 되는 사회를 만드는 일이다.
문애리 덕성여대 약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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