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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남중국해, 한국이 아세안과 함께 해나갈 일

박민정 국립외교원 인도태평양연구부 연구교수

[기고] 남중국해, 한국이 아세안과 함께 해나갈 일
박민정 국립외교원 인도태평양연구부 연구교수
지난 8일 개최된 서울안보대화에서 인상적인 장면이 나왔다. 본회의에서 발언하던 길베르토 테오도로 필리핀 국방장관에게 쪽지 한 장이 전달됐다. 남중국해 중재 판정은 불법이며 무효라는 내용이었다. 중국 측이 건넨 것으로 보이는 이 쪽지에 대해서 그는 중국이 판정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패소한 탓이며, 나아가 이는 유엔해양법협약을 짓밟고 주최국 한국에 대한 결례를 범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작은 소동처럼 보이지만, 이 장면은 남중국해의 현실을 압축한다. 국제법을 둘러싼 힘겨루기, 그리고 물러설 뜻이 없는 중국이다.

남중국해는 한국의 수출입 화물과 에너지가 대거 지나는 바다다. 지난 2월 말부터 이어진 호르무즈 위기는 항행의 자유도 이제 비용과 역할 분담을 요구하는 문제가 되었음을 보여준 상황에서 남중국해의 안정은 더욱 절실하다.

올해는 필리핀이 아세안 의장국을 맡았고, 필리핀은 2002년 이후 20년 넘게 논의만 이어져 온 남중국해 행동규칙(COC)을 연내에 매듭짓겠다는 목표를 내걸고 중국과 매달 협상을 이어 왔다. 그러나 전망은 밝지 않다. 법적 구속력 여부, 적용 범위, '자제(self-restraint)'의 정의 같은 핵심 쟁점이 여전히 미해결이다. 중국과 필리핀의 입장차는 계속되고, 아세안 내부에서도 필리핀, 베트남 같은 당사국과 그렇지 않은 나라 사이의 온도 차가 크다. 연내 타결은 쉽지 않아 보인다.

그런데 아세안 내부에서는 다른 목소리도 있다. COC 채택보다, 중국이 남중국해에서 더 공격적으로 나오지 않도록 다독이고 긴장을 낮추는 일이 실질적으로 더 중요하다는 시각이다. COC는 애초에 영유권 분쟁을 해결하거나 해양경계를 획정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해상에서의 행동 규범을 정해 충돌을 관리하려는 장치다. 이 관점에서 보면 '성공'의 척도는 협상 타결 자체가 아니라, 우발적 충돌을 줄이고 항행을 실제로 안정시키는 역량이다.

바로 여기에 한국이 기여할 공간이 있다. 아세안이 스스로 바다를 관리할 역량을 키우도록 돕는 것이다. 위성·선박정보를 활용한 해양상황인식, 해상교통관리, 해경 역량 강화, 수색·구조, 불법어업 대응 같은 분야는 특정국을 겨냥하지 않으면서도 긴장을 낮추고 질서를 떠받친다. 한국은 세계적 수준의 조선·해양 기술과 훈련된 해경 역량을 갖춰, 이런 비군사적 협력에서 내놓을 것이 적지 않다. 마침 아세안은 해경포럼 설립과 필리핀이 제안한 아세안 해양센터 설립을 준비하고 있다.

오는 11월 마닐라에서 개최되는 한·아세안 정상회의는 그 출발점이 될 수 있다. 해양상황인식 공동 플랫폼 구축이나 해경 합동훈련·역량강화처럼 아세안의 해양관리 역량을 실질적으로 높일 수 있는 협력 사업을 한국이 먼저 제안해 볼 만하다. 이는 어느 한 강대국의 편에 서는 방식이 아니라 아세안의 자체 역량을 높여 역내 안정에 기여하는 접근이다.
이를 통해 한국은 아세안에 문화·경제 파트너를 넘어 신뢰할 수 있는 전략적 파트너로서 입지를 넓혀갈 수 있다.

서울에서 오간 설전이 보여주듯, 남중국해의 질서는 이미 우리 문 앞의 문제다. 그 바다는 강대국 대결을 멀찍이 구경하는 남의 것이 아니라, 우리 생명선이 지나는 곳이자 아세안과 함께 관리해 나가야 할 공동의 과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