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부칼럼 >

[김세원의 문화읽기] 백일장이 아닌 노벨문학상

[김세원의 문화읽기] 백일장이 아닌 노벨문학상
김세원 전 한국문화관광연구원장

10월은 노벨상 수상자 발표로 시작된다. 다음 주면 생리의학상을 시작으로 물리학, 화학, 문학, 평화, 경제학 분야의 수상자가 차례로 호명된다. 1901년 첫 시상 이후 노벨상은 인류가 가장 권위를 인정하는 상이 되었지만, 분야마다 무엇을 재는지는 다르다. 과학상은 검증된 발견과 기술적 성취를 평가한다. 반면 평화상과 문학상은 당대의 역사적 맥락과 시대의 공기를 반영한다. 과학상 수상자를 두고 '왜 하필 그 사람인가'를 묻는 일은 드물지만, 문학상 발표 뒤에는 거의 해마다 해석과 평가가 엇갈린다.

노벨문학상의 120여년 역사를 반추해 보면 이 상은 단 한 번도 '누가 가장 잘 썼나'를 가린 적이 없었다. 노벨은 유언장에 '이상적인 방향으로 가장 뛰어난 작품을 쓴 사람'이라 적었고, 이 모호한 '이상적'을 어떻게 읽느냐가 곧 상의 역사가 되었다. 20세기 초 한림원은 이를 기독교적 도덕관으로 읽어 톨스토이와 에밀 졸라 같은 거장을 '지나치게 급진적이거나 추악함을 적나라하게 그렸다'는 이유로 탈락시켰다. 두 차례 세계대전은 그 기준을 송두리째 바꾸었다. 이상주의는 희망을 노래하는 태도에서 비극을 직시하는 태도로 옮겨 갔고 헤세와 카뮈, 홀로코스트를 증언한 넬리 작스가 그 전환을 대표한다. 냉전기에는 체제의 폭력을 고발한 문학이, 탈식민 시대에는 주변부의 목소리가 호명되었다. 외압에 밀려 상을 거부한 파스테르나크와 신념으로 거부한 사르트르는 이 상이 한 번도 정치의 무풍지대에 있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역사적 트라우마와 인간의 연약함을 응시한 한강의 수상도 이 궤적 위에 있다. 노벨문학상은 문장의 완성도를 가리는 트로피가 아니라 시대의 상흔 앞에서 작가가 취한 태도를 다는 저울이었다.

이 사실은 생성형 인공지능(AI) 시대에 새로운 무게를 얻는다. 거대언어모델은 방대한 텍스트를 학습해 몇 초 만에 거장의 문체를 흉내 내고, 매끄러운 플롯을 조립한다. 문장의 유려함과 서사의 기교는 더 이상 인간 작가의 독점 자산이 아니다. 그렇다면 언젠가 기계가 쓴 소설이 이 상을 받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그러나 기계가 복제할 수 없는 것이 있다. 그 문장이 어디에서 길어 올려졌는가 하는 삶의 내력이다. 노벨문학상이 한 편의 작품이 아니라 작가의 문학세계 전체에 주어지는 '작가상'이라는 점이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물론 낙관만 할 일은 아니다. 번역과 편집, 자료 조사에서 AI는 이미 작가의 도구가 되었고 기계와 함께 쓴 작품을 어디까지 작가 자신의 작품으로 인정할지는 모든 문학상이 머지않아 답해야 할 질문이다.

그럼에도 방향은 분명하다.
잘 쓴 글이 흔해질수록 상은 문장이 아니라 그 문장에 이르기까지 작가가 통과한 시간을 더 엄격하게 물을 것이다. AI 시대의 노벨문학상은 가장 잘 쓴 사람이 아니라 그렇게 쓸 수밖에 없었던 사람을 찾는 제도로 남을 것이다. 올해 스톡홀름의 저울이 누구를 가리키든, 우리가 읽어야 할 것은 그 이름 뒤에 놓인 시간이다.

김세원 전 한국문화관광연구원장

■약력 △고려대 국제통상학 박사 △뉴욕주립대 기술경영학 석사 △전 가톨릭대 부교수 △전 동아일보 파리특파원 △문화코드로 읽는 지구(2019)